| 영의 세계를 깊이 공부하고 경험해 나가다 보면, 자연과학의 프랙탈 이론처럼 하나의 작은 조각 안에서 전체를 느끼게 되는 신비로운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프랙탈 이론은 자연 속의 나뭇가지 하나, 눈송이 하나, 해안선의 굴곡 하나하나가 전체 구조와 동일한 패턴을 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말 한마디, 쓰는 글 한 줄,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그 사람의 현재 영적 상태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증거이자 지문과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말과 소리에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왔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관들은 신성한 언어에 창조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공자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라 하였고, 소크라테스는 "말하라, 그러면 나는 너를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과 소리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드러내는 지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을 통해서는 ‘목소리’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장 63절). 이 짧은 말씀 안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의 내용, 즉 그 안에 담긴 진리 자체가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나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흘러나온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히브리서 4장 12절)라고 하였듯이, 그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뚫고 들어가 생명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그것이 영혼 안에 뿌리내릴 때, 죽어 있던 영이 살아나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더욱 놀랍고 신비로운 차원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의 내용뿐 아니라, 그 말씀의 소리 자체, 목소리 그 자체가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무덤 속에서 부패가 시작된 나사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장 43절)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어 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치셨거나 교훈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직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그 소리에 담긴 영과 생명이 죽음의 세계를 뚫고 흘러들어 나사로를 살려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 그 자체가 영이었고,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창세기 1장 3절)고 말씀하실 때, 그 소리와 함께 빛이 창조된 사건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소리에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것을 살리는 창조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신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즉 로고스는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며, 그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곧 하나님의 영과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목소리 안에도, 그 사람의 정체성과 영적 상태가 고스란히 담겨 흐릅니다. 프랙탈 이론처럼, 목소리라는 하나의 조각 안에 그 사람의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지금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두려워하는지를 느낍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의 목소리인지, 오랜 병으로 기력이 쇠한 사람의 목소리인지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 가슴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우리 모두 해보았을 것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를 담아내는 목소리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 역시 사람의 표현 방식 속에 그 사람의 무의식과 내면의 전체가 투영된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감정 상태, 건강 상태, 심리적 안정감이 음파의 형태로 고스란히 실려 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성 발현’ 이후 영과 의식의 세계가 더욱 깊이 열려갈수록,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영의 흐름에 대한 민감함도 함께 자라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신의 영적 상태보다 얕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 왠지 모르게 불편함이나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그 소리에 담긴 영의 생명이 자신보다 얕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보다 더 깊고 맑은 영적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 아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소리 자체에서 생명과 평안이 흘러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7절)는 말씀처럼, 참된 생명의 소리는 영 안에서 울림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이러한 생명 어린 소리를 들을 때는 누구나 그 소리로 끌림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이 영을 알아보는 신비로운 감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깊은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쌓거나 더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어, 우리의 목소리 안에 흐르는 영의 질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장 34절)는 말씀처럼, 결국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영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골라 쓴다 해도, 그 목소리에 담긴 영의 울림은 감출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 공동체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소리 자체에서 영과 생명의 깊은 울림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올리지만, 그 목소리 안에 흐르는 영의 깊이가 메마른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 까닭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자면, 많은 경우 진리의 말씀을 문자와 지식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의식에 머물거나, 아니면 성령의 불을 받은 그 감정적 격동 안에만 머물며,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목소리는 아무리 크고 유창하다 해도 듣는 이의 영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 공동체의 목소리가 가진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므로 기독 공동체인 우리 모두가 영과 의식의 세계가 날마다 더 깊이 열려가고, 하나님 안의 더 깊은 진리와 생명 안으로 나아가고 그 속을 거닐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말의 표현과 내용뿐 아니라, 말 소리 그 자체에도 하나님의 영과 생명이 더욱 풍성히 흘러넘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듣는 이에게 생명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목소리 자체가 하나님의 영과 생명의 통로가 되는 복된 우리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늘 빛 나눕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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