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영적 주제] 신앙의 단계와 여정 10

작성자초록 등불|작성시간26.06.14|조회수25 목록 댓글 1

https://youtu.be/qI1RsTHuuF8

 

5) 깨달음의 세계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나름대로 오랜 시간 배우고 경험하는 과정을 지나던 중,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때에 문득 "진리는 깨달음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에 깊이 흘러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떠합니까. 재정과 환경, 관계와 질병,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인간이 마주하는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두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요한복음 1111)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이 절망이라 말하는 것을 성경은 안식이라 말하고, 세상이 끝이라 말하는 것을 성경은 새로운 시작이라 말합니다.
 
이후 깨달음에 대하여 오랫동안 묵상해 보니, 우리가 머리로 아는 진리는 지식일 수는 있지만 아직 우리의 것이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의 의미가 깊이 깨달아져 마음에 새겨지고 삶 속에 실제가 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성경도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잠언 4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많은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삶의 실제가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종종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과 경험을 넘어섭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 하시며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29). 사람의 생각으로는 십자가가 패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원의 능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죽음이 절망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믿는 자에게 죽음조차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진리는 우리의 혼적인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묵상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제는 분명하게 믿어졌던 말씀이 오늘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요한복음 157)이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시편 12)를 복 있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는 '수행'이라는 표현을 다소 낯설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언어로 동일한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삶, 경건의 훈련, 말씀 묵상, 기도, 순종, 인내가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 47)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은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시작된 신앙은 성령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변화되는 성화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지식의 세계는 가르침을 통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세계는 단순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스승은 길을 가리킬 수 있지만 대신 걸어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는 있지만,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는 과정은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직접 통과해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편 11913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깨달음의 세계는 성화의 세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정보나 지식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진리가 삶의 실제가 되도록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도 머리의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와 여러 속박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복음은 단순히 아는 교리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생명이 됩니다. 또한 신앙의 길이 단지 교회를 다니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평생에 걸쳐 변화되어 가는 깊은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서 있음을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광대한 영적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진리에 대하여 깊이 눈을 떠 갈수록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가 되고, 탄생과 죽음은 영원이라는 더 큰 시각 안에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내일과 연결되어 있고, 시간은 영원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쉽게 염려하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깨달아 가며, 진리가 삶이 되도록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함께 진리를 깊이 깨달아 가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의 실제를 날마다 경험하는 복된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머리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의 깨달음과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10. 신성 합일의 단계
 
이것은 제가 생각해 본 신앙의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깊은 여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필요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구하고, 평안을 구하고, 관계의 회복을 구하며, 삶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구합니다. 또한 영적인 여정 속에서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영적인 능력, 어둠의 권세를 이길 힘과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괴로움과 두려움, 염려와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구합니다.
 
이러한 구함들은 모두 의미 있고 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구함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삶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위한 구함일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가장 고결한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기쁨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한 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시작하지만, 점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도 마지막은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계 같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은 죽고 신성합일을 이루는 것이 신앙의 마지막 여정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삶의 완전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요한복음 530)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누가복음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자신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의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한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는가가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는 말씀에 담긴 삶일 것입니다. 또한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라는 말씀의 실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개성을 없애거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할 때 언제나 사랑과 순종 안에서의 연합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요한복음 1721)라고 기도하신 것도 이러한 연합을 가리킵니다.
 
교회 역사 속의 많은 성도들도 이러한 삶을 갈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립보서 121)라고 고백하였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을 높이는 삶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점점 더 깊은 사랑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지나, 더 이상 억지나 의무감이 아니라 자유함 가운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나며,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고결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 비추어 보면 지금의 우리는 아직 부족하고 연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기보다 더욱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순종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진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임을 알고, 깨달음이 삶의 실제가 되도록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복된 우리들이면 좋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고 귀한 약속을 통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베드로후서 14)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 온유와 긍휼을 닮아 가는 깊은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에베소서 413) 자라가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들이면 좋겠습니다.
 
다소 길었던 신앙의 여정에 관한 나눔을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안에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해 봅니다. 하늘 생명 평안 나눕니다. 샬롬.


소식 공지
     사랑 감사 (후원)    책구매 안내     초록의 숲    기도배경음악    방언기도(클릭) 

 

Daum 카페 (클릭)    네이버 카페 (클릭)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초록 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4 [인사] 여름 한 주도 강건 평안하세요. 하늘 평강 나눕니다. 샬롬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전체의 글 한번 나누겠습니다)

    - 삶의 어려움들 승리하세요. 하늘 위로 소망 능력 전합니다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아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