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더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8:18-22)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입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나병은 단순한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영적 나병, 곧 죄의 오염으로부터 인류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어서 5절부터 13절까지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14절부터 17절까지는 예수님의 사역의 두 축이 함께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자유하게 하심으로써 말씀의 선포와 치유의 사역이 하나임을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얼마나 뜨거운 고백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태복음 8:20)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거처가 없다는 물질적 빈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이 땅을 사시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여우는 자신의 굴로 돌아가고, 새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에는 자신을 위한 안식처, 자신을 위한 안락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 들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그 섬김의 길은, 세상이 말하는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히브리어로 '인자'는 '벤 아담(בֶּן אָדָם)'이요, 아람어로는 '바르 에나쉬(בַּר אֱנָשׁ)'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즐겨 사용하신 호칭으로, 참 인간으로 오신 분, 그러나 동시에 다니엘서의 예언 속에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니엘 7:13-14) 이 예언 속의 인자, 곧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영원한 권세와 영광을 받으실 그 메시아가,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가지신 분이 스스로 그 영광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길의 원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서기관의 열정을 꺾으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열정이 낭만적인 기대 위에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자기 부인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이 길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순교자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잃어버릴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그는 그 말대로 살았고, 에콰도르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 삶이었습니다. 2.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라 또 다른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합니다. '주여,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인간의 관계 중에 가장 깊고 가장 가까운 것이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 관계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가장 함께해야 할 순간이 바로 죽음의 자리입니다. 이 제자의 간청은 어떤 면에서도 나무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8:22) 여기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일을 처리하게 하고, 생명을 얻은 너는 생명의 주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가족을 저버리라는 냉혹한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26) 여기서 '미워하다'는 표현은 셈족 언어의 비교법적 표현입니다. 문자 그대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에 비하면 그 모든 것이 미움처럼 보일 만큼, 주님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그 사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어야 비로소 제자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을 때, 그 모든 인간적 사랑도 바른 자리를 찾게 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이란, 삶의 모든 관계와 모든 자리에서 주님이 첫 번째 자리에 계신 삶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이 울립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조금만 더 준비가 되면', '이 일만 마무리되면', '이 관계만 정리되면'이라는 말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미루어 왔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는 미룰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그 부르심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적은 자들아 23절부터 27절로 이어지는 장면은 제자의 삶에 요청되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중에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납니다. 파도가 배를 덮을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 자리에는 오랜 세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온 어부 출신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두려워 떨었다는 것은, 그 상황이 얼마나 극한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사람들이 두려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외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태복음 8:26)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표현은 '올리고피스토이(ὀλιγόπιστοι)'로, 문자적으로는 '작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책망이 아닙니다. 풍랑이 이는 그 자리에서도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상황에 압도되어 버린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자연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놀라며 말합니다. '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당신이 단순히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실제로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풍랑의 사건은 시편의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가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며 물결도 잠잠하게 하시는도다."(시편 107:29). 구약의 하나님께서 폭풍과 물결을 다스리신다고 노래한 그 시편의 말씀이,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는 반드시 풍랑이 있습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잔잔한 바다만 건너는 제자의 삶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거의 파선 직전의 상황이었고, 함께 탄 사람들은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사도행전 27:23-24) 풍랑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바울은 그 믿음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 본문을 통하여 제자 된 우리가 늘 함께 하시는, 풍랑도 다스리시는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며,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의 제자의 삶을 살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오직 믿음의 길임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역자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일반 성도는 삶의 자리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은 결코 하나가 더 귀하고 다른 하나가 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삶은, 그 자리가 어디든 제자의 삶입니다. 그 길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처럼, 세상이 약속하는 편안함과 안락함과는 다른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때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할 때도 있고,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앞에서 인간적인 미련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풍랑조차 한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이 함께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이 배 안에서 두려워 떨 때에도 예수님은 그 배 안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먼 곳에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가는 그 풍랑의 자리에 함께 타고 계신 분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상황이 두렵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너무 쉽게 풍랑을 바라보고 주님을 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 된 우리와 언제나 함께 이 자리에 계십니다. 모든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그 배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길이며, 생명이 있는 길이며, 주님이 함께하시는 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우리는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제자 된 삶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늘 빛 나눕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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