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러 나오고, 그를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태복음 8장 28~34절)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 34절의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센 폭풍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신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곳은 가다라 지방이었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의 땅이 아닌 이방의 땅, 돼지를 치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낯선 땅에서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곧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1. 귀신의 거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생명이 끝난 자리, 썩음과 어둠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성경은 이 무덤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놓인 우리 인간의 실존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 그늘 아래 두 광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바로 그 죽음에 속한 곳, 악의 그늘이 드리운 자리에 터를 잡고 거합니다. 귀신은 생명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죽음과 부패가 있는 곳을 거처로 삼습니다. 우리가 악에 거할수록 귀신의 터가 됩니다. 본문에는 돼지 떼도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레위기 11장 7절) 레위기의 정결 규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굽이 갈라진 쪽발이어야 하고, 새김질을 하는 동물이어야 했습니다. 소와 양은 이 두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에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굽이 갈라진 쪽발이기는 하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조건의 절반만 갖추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굽이 갈라진 쪽발'은 분별을 상징합니다. 발굽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걸어가는 길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누어 분별하며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하다'는 단어 '카도쉬(קָדוֹשׁ)'의 근본적인 의미도 '구별되다', '나뉘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고 나뉘어진 삶, 곧 분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새김질'은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소나 양 같은 반추 동물은 한 번 삼킨 먹이를 다시 입으로 올려 되새기고 또 되새깁니다. 이 반복적인 되새김의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되새기며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빚어가는 묵상의 삶을 나타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편 2절)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새김질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이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한 번 삼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되새기지 않고,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마음에 붙잡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돼지의 생김새를 살펴보면, 돼지는 귀가 눈을 덮어 가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지 못하고 늘 땅만 내려다보며 삽니다. 하늘의 것은 구하지 않고 오직 땅에 속한 것,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좇으며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결국 돼지가 부정한 이유는, 분별 없이 살고 말씀을 되새기지 않으며 오직 땅의 욕망만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 곧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며 세상의 욕망과 탐욕으로만 가득 채워진 사람들 안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돼지처럼 땅만 바라보며 사는 삶, 그것이 곧 귀신의 터가 됩니다. 2.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심 빛이 어두운 곳에 비추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영적인 법칙입니다. 빛이 야행성 동물에게 갑작스럽게 비추어지면 그 동물이 발작하듯, 빛이신 예수님께서 가다라 땅에 나타나시자 귀신들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는 그 외침은, 귀신이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발작하는 현장을 보여 줍니다. 야행성 존재들은 빛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어둠의 권세는 빛 앞에서 힘을 잃고 도망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한일서 3장 8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으로 묶인 인간을 그 결박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너무나도 사나운 귀신에 사로잡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놓인 우리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귀신으로부터 자유와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장 13절)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곳은 유대인의 땅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 가다라였습니다. 주님은 굳이 바다를 건너 이방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구원의 빛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에서도 마귀의 일을 멸하셨고, 그 빛은 민족과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비추어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입니다.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장 1~2절)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임합니다. 그 빛 앞에서 우리 안의 가다라 광인의 귀신들, 죄와 욕망과 어둠은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변화가 아닙니다. 권세의 이전입니다. 마귀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 안의 귀신들을 쫓아내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거부할 세상 그러나 이 본문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모습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 들렸던 두 사람이 자유함을 얻은 그 놀라운 사건 앞에서, 온 시내 사람들이 나온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자유를 얻은 두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몰사한 돼지 떼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손해가 생명의 회복보다 컸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 12~13절)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합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땅에, 생명보다 물질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돼지 떼의 죽음을 더 아파하며 예수님을 떠나 보낸 것처럼, 세상의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분명합니다. 귀신과 함께한 돼지 떼가 바다로 몰아가 몰사한 것처럼, 예수님을 거부하고 마귀의 일에 동참한 삶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 고통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4장 11절)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요, 구원을 등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욕망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4. 결론 예수님은 이 땅에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살던 두 광인을 자유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안의 귀신들을 쫓아내려고 오셨습니다. 그 자유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날마다 우리의 삶 안으로 영접할 때, 그 빛 안에서 우리는 죄와 어둠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빛을 받은 우리를 가리켜 '빛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베소서 5장 8절)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그 빛을 우리 안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 아직도 무덤 사이에서 귀신의 사슬에 묶여 사는 영혼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다라의 두 사람이 자유를 얻은 것처럼, 우리의 이웃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유의 통로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함을 누리며, 이웃과 세상도 자유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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