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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음(邪淫)의 과보

작성자의원네|작성시간18.05.05|조회수794 목록 댓글 0

사음(邪淫)의 과보

 

사음을 경계하는 논단(論壇戒邪淫)

 

 

사음으로 인하여 현세에서 과보를 받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내세에서 받을 과보는 잠시 제쳐두고 현세에서 과보를 받은 몇 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경계를 삼고자 한다.<편역자>

 

 

1. 사업을 핑계로 유흥가를 드나들던 남자의 비극

 

1930년대 상해의 영국조차지에서 황견성(黃堅成)과 강()씨 아가씨는 재능있는 대학생으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후 두 사람은 협력하여 견성무역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였다. 두 사람은 영어를 잘하고 교제능력이 좋았으며, 영국과 미국의 고객을 위주로 무역을 하여 몇 년간의 경영을 통하여 상해의 저명한 큰 부호가 되었다.

장사는 순조롭게 발전하고 아내는 아들을 낳아 대유라고 이름 지었다. 아내는 아이를 돌보기 위하여 회사는 견성 혼자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상업상의 접대를 언제나 부부가 같이 하다가 지금은 혼자 나가서 접대를 하게 되었으며,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한 후 다시 손님을 모시고 유흥업소에 가서 즐겁게 하다 보니 밤늦게 집에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점점 습관이 되었다.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접대는 더욱 많아졌으며, 어떤 때는 한 주에 5, 6번이나 될 정도 많아지게 되어 아내와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은 갈수록 적어졌다. 아내 강씨는 현숙하고 선량하여 남편이 사업을 위하여 바쁜 것을 이해하려고 하니 단지 자기의 감정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 대유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하고 부친과 가까이할 기회가 매우 적었으며, 어머니가 유일한 가족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달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마음을 억누른 것이 병이 되어 강씨는 날로 수척하고 식욕이 부진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다. 견성은 아침에 나가 밤에 돌아와서도 아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강씨는 남편이 걱정할까봐 자기의 병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극도의 허약함으로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혼미해져 굴러 떨어졌으며,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하였으나 이미 늦어 뇌진탕으로 죽었으며, 그녀의 나이 37세였다.

그해 16세의 대유는 갑자기 같이 살던 자애로운 어머니를 잃고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으며, 고독한 생활을 적응해 나갈 방법이 없었다. 비록 부친이 약간의 관심을 갖고 충분한 용돈을 주었지만 시종 마음의 상처를 메울 수 없었다. 더욱이 매 주말이면 더욱 공허감을 느껴 처음에는 친구들과 영화보러 가다가 점점 술집이나 룸살롱 등에 가서 시간을 보냈으며, 또한 담배를 배우고 술을 마시면서 이전의 착한 학생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그의 부친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 주말 황견성은 손님과 룸살롱에 갔는데, 놀랍게도 아들 대유가 무녀(舞女)를 껴안고 택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본래 그를 말릴 생각이었지만 손님이 알까봐서 보고만 있었다. 깊은 밤에 대유가 집으로 돌아오자 부친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갔다 오는거야?”

약간 술이 취한 대유가 대답하였다. “당신이 간 곳에 갔죠.” 다년간의 원망의 울분을 토해내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견성은 부끄럽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면서 10여 년간의 자기가 지내온 행동을 알고는 아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는 아들에게 묻지 않고 각자 풍류의 생활을 하였다. 2년 후 대유는 매독이라는 성병에 감염되었지만, 부친은 결코 알지 못했으며, 부끄러워 병원에 가지 않고 자포자기하면서 인생에 더 이상 미련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병이 중하여 죽었으며, 당시 18세였다.


황견성은 2년간 아내도 잃고 아들이 이렇게 죽자, 비로소 자기가 십 몇 년을 사업과 풍류에 미쳐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의 비극을 잉태하였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기가 소침하여 다시는 사업을 경영할 의지가 없게 되었다. 일찍이 상해에서 이름을 떨치던 무역상인이 그로부터 소리없이 사라졌다. 황견성이 20년간 재물과 여색에 도취되어 생활해온 막중한 대가가 마치 일장춘몽과 같이 지나갔으며, 깨어났을 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따라서 사회의 명류인사와 청년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몸을 지키기를 바라며, 경각심을 높여 위험을 미연에 방비하여 마땅히 풍류의 장소에 들어가면 마치 호랑이 꼬리를 밟은 것처럼 조심할 것이며, 욕망의 바다에 빠지는 것은 마치 봄철의 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풍류의 장소에 쓰는 금전과 정력을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써서 인간사회를 복되게 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흉함이 소멸되고 복이 모일 것이며, 상서로운 광명이 대지를 비출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남은 생의 부귀의 원천을 심고 자손을 위하여 만세의 무궁한 복덕을 쌓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착한 일이므로 어찌 행하지 않을 것인가!

돈은 만능이지만, 또한 만 가지의 악을 지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바르게 쓰는 것은 스스로 복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며, 그것을 삿되게 쓰면 스스로 죄업을 짓는 것이다.

 

 

2. 71세의 천만부자가 가난하여 죽다

 

소중립(巢中立)은 호남성 상덕시(常德市)에서 가장 유명한 천만부자였다. 상덕에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사고, 가장 먼저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산 사람도 그였다. 2005년 설날 전 71세의 소중립은 초팔일에 자살할 것이라는 말을 내었다. 비록 소중립은 여러 차례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17일 정월 초 9일 이웃집 사람이 목을 메달아 자살한 것을 발견하였다.


소중립은 많은 돈을 여인의 몸에 사용하였다. 일찍부터 소중립과 교류해온 상덕시의 언론매체 기자의 소개에 따르면, 소중립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강서성 출신의 대학 1학년인 여자 대학생을 정부(情婦)로 들여 200여 만 위안의 돈을 쓰고, 사천성 출신의 대학생을 정부로 들여 100여 만 위안의 돈을 썼다고 하였다.

소중립이 자살한 직접적인 원인은 이전의 천만 부옹(富翁)이 영락하여 가난하게 된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는 가장 가난할 때 심지어 국수 한 그릇 사먹을 돈이 없었다고 하였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지경으로 영락하게 된 것은 결코 소중립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은 소중립은 시종 자기를 드러내어 이전 자기가 경영하던 슈퍼매점에 자기 이름 석자 소중립이란 붉은 큰 글씨로 썬 간판을 달았으며, 정문위에는 더욱이 천만부옹에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플래카드를 건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상덕에서 제일 먼저 거북이 같이 생긴 외제차를 탄 사람이 소중립이라고 안다. 그 당시 내륙의 대다수 주민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해야 비로소 텔레비전 한 대를 살 수 있었는데, 그는 심천의 집에 29대의 TV를 벽에 걸어두고 모든 TV를 다 켜서 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재부(財富)는 소중립의 몸에서 가장 빛나는 표시였다. 그는 1, 2, 3회 정협위원(한국의 도의원이나 시의원과 같은 역할)이 되었으며, 정치협상회의를 열 때 그는 황금 목걸이와 고급 시계를 차고 손에는 벽돌만 한 휴대폰을 들고 왔다고 한다. 그는 더욱 CCTV방송국 등 100여개의 언론매체에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심지어 일본의 문예춘추지에 자기의 성공열전을 크게 등재하기도 하였다.

200010월 소중립은 함께 창업을 한 아내와 협의이혼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재기하기 위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호화로운 생활에 젖은 그는 결국에는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2005년 설날 전 그를 따르던 18세의 여자는 마침내 그의 가난함을 견딜 수 없어 떠나고 말았으며, 소중립은 굳게 닫힌 가게문 앞에서 혼자 처량하게 설을 보냈다.

 

 

3. 고객의 돈을 횡령한 은행간부의 말로

 

79일 그 지방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400여 만 위안의 은행공금을 횡령한, 8명의 정부를 가진 중국건설은행 달주시(達州市) 달강분소장 초홍파(肖洪波)는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초홍파는 금년 37세이며 거현(渠縣)출신이다. 199812월부터 20015월까지의 기간에 초는 중국건설은행 달주시지점 달강분소 회계 및 출납을 담당하는 부주임을 맡아 직접 고객의 현금을 장부에 넣지 않고 이중장부를 만들어 위장하여 고객에게는 가짜 은행장부를 제공하는 수법으로 전후 92차례 은행공금 408만 위안을 횡령하였으며, 아울러 횡령한 공금을 사치품구매, 호화도박, 8명의 정부(情婦)를 두는 데 써버렸다. 사건이 발생한 후 초홍파는 관련 장부를 태우고 도망갔으며, 후에 신장에서 경찰에 잡혔으며, 아울러 2년 전 달주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았다.


78일 오후 4시 초홍파는 사형이 집형될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매우 평정하게 말하였다. “이런 일을 범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지 못한 것은 그의 딸이었다. 딸에게 남긴 유서에서 말하기를 나의 교훈은 심각하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생명의 진정한 의의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였으며, 인생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너는 반드시 생명을 소중히 하고 열심히 공부할 것이며, 매 하나의 일을 하는데도 성실하게 하길 바란다.”

초홍파는 생전에 8명의 정부를 두고 그가 횡령한 거금의 대부분을 그녀들의 몸에 썼지만, 그가 사형이 집형될 때까지 이들 정부들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소식에 따르면 초홍파가 사형의 판결 후에도 찾아온 친척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최후의 식사 때 감옥에서는 고기와 만두를 준비하였지만, 초홍파는 이미 입맛이 없어 단지 세 개의 물만두를 먹었을 뿐이다. 형장에서 그의 시선은 멍청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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