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행복
고후 12장 9~10절
진열장 속에 있는 상품은 눈으로 보라고만 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진열장 속에 있는 상품과 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그림은 먹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과 멀리 떨어진 것과 같이 느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도 있고, 기쁨과 사랑도 있습니다.
빛처럼 부어지는 한량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그림의 떡과 같고
진열장 속에 있는 상품과 같이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만 때문에 우리가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행복해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양식이 풍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 안에 교만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소리가 커지고 싸움이 많이 일어나며
불평과 불만이 가득차 있는 것은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남과 북의 삼팔선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단절시켜 놓고 서로 다투고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본성과는 반대가 되는 그 모든 교만을 물리쳐야 합니다.
교만을 물리치며 사는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복주의 영향으로 신앙을 맹목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앙은 당장 무슨 사업을 하면 대박이 터지고
무슨 일이든지 요정램픔처럼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 질 것이라 생각하는
기복주의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인 겸손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겸손을 가지지 못하면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참된 겸손을 가져야 하는데
참된 겸손은 교만과 결별하지 못하고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만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교만이 붙어있으면 절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지난 날의 삶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 인생에 무엇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내 인생에 어떤 교만을 붙여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반드시 우리 인생은 교만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교만의 모든 먼지를 훌훌 털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것까지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신앙은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겸손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겸손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될 수 없고
참된 믿음이 없이는 참된 겸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 뜻만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자신만 믿고, 또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그 교만,
그러한 교만은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막아 그 나라의 축복을 소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분을 느끼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것은 거절하는 힘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에
그 구원은 결코 겸손이 없이는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은 어떤 경우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겸손이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결코 믿음과 겸손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백부장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 하였다"고 하면서
백부장의 믿음은 가장 크고 위대하다고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오 주여!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과 지극한 겸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도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지극한 겸손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개의 호칭을 사용했을 때
이 여인은 “옳소이다. 주여,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으로 인정을 받은 그 여인의 본 바탕에는
지극한 겸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기 원하고
모세와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 주었던 그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겸손의 바탕이 없이는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하고
위대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겸손의 반석 위에 세워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겸손의 반석 위에 믿음을 세울까요?
그것은 믿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겸손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지 못하게 할까봐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신앙은 겸손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덮으려 하지 마시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높여주시면 겸손이 끝난 줄 알고
더 교만해 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는 것은 더 낮아지라고 높여 주신 것이지
이제 겸손은 끝났다고 해서 높여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줄로 생각된 사람들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의 기쁨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낮아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믿음과 겸손이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겸손과 신앙이 만나면 행복이 옵니다. 겸손과 신앙의 결과는 행복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크게 받음과 동시에
스스로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3번 기도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질환을 말합니다.
세 번의 기도 끝에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 가시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시를 통해 자신을 더욱 낮추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 때부터 그 가시로 인해 받는 고통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제는 그 고통에서 놓여 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겸비의 자리, 곧 그 자체가 축복의 자리요,
능력과 기쁨의 자리인 것을 바울이 분명히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바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 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으면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을 불행하게 생각해고 놓여 지기를 원합니다.
겸손을 원하지만 겸손하게 하는 가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코 그 겸손은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겸손과 믿음이 만나면 행복이 오는데
겸손을 원하지만 그 가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그 가시가 겸손이 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자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오나 그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임재하게 되자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모든 자아가 물러가게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아니면 육신이 요구하는 모든 욕심을 분쇄할 수 없고
예수님의 임재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받는
어떤 굴욕도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의 체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겸손만을 모든 은혜의 최고봉으로 삼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평소에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한 것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시로 인해 고통받는 그 문제를 자신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한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하는 중에 같이 심방하는 분의 약한 것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움에 빠진 가정에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그 분의 약한 것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심방을 가신 분이 어떻게 자신의 약한 것을 건드릴 수 있느냐 하며
저에게 시험 들었다고 대 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설명을 받아주지 않고 자기가 시험들었다는 것 밖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겸손한 성도는 자신의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심방을 하고 어떤 굴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즐거워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들은 바울처럼 자신의 약한 것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배워야 할 최고의 교훈은 겸손입니다.
성도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성결은 지극한 겸손입니다.
그리고 이 겸손은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향해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도 바울처럼 약한 것을 자랑하며, 비방과 궁핍과 환란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비난과 시비와 또는 친구와 혹은 원수로부터 책망을 들을 때,
또는 훼방과 고난을 당할 때마다,
또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이 때에야 말로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길 원합니다.
자신의 약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자신의 명예와 고집과 욕망으로 만회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겸손만을 즐거워할 수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비난이 있고, 또 박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나에게는 예수님만이 전부라고 일편단심 고백하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나의 육적인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갈 때에
그것이야 말로 참된 은혜이고, 천국을 소유한 참 행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겸손한 중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삶의 처지가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지 간에
천국을 소유한 참된 은혜를 가진 행복을 가지게 됩니다.
지극한 겸손과 위대한 믿음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가족이 행복하고, 우리 교회 성도들이 행복하고
직장과 사회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가끔 육체적 질병의 아픔 속에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그분을 만나면 항상 행복했습니다.
그 분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항상 자신을 내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시면 양평군민이 다 몰려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겸손으로 약한 자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고
돌아가신지 한 달이 지나고서야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저에게 연락이 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은
평소에 겸손하셨던 그 분이 그 분의 유지에 따라서
겸손하게 장례를 치룸으로 말미암아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왜 겸손한 분이 되었느냐 하면
젊은 시절에 폐결핵으로 죽을 뻔하였던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항상 자신은 덤으로 인생을 산다고 했습니다.
이런 은혜와 감사가 평생 겸손과 섬김으로 산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겸손의 신앙으로 산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체험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신앙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극한 겸손으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참된 행복과 기쁨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