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나이 카놈 톰'으로 이름이 잘못알려진 태국의 최대영웅의
전설이있다. '나이 카놈 톰'이 아닌 '카놈 똠'이 그의 이름이며 별명이다.
'나이'가 뜻하는 것은 영어에서의 '미스터'이며 '카놈 똠'은 태국음식의
이름이다. '카놈 똠'(달작지근한 국물에 쌀이 들어있는 일종의 간식)을
그가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에 대한 얘기이다.
'나이 카놈 똠' 18세기 사람인 카놈 똠(khanom ttom)은 태국의
최대영웅이다. 해마다 3월 17일 이면 모든 무에타이 경기장에서 그를
기리 는 행사가 벌어진다.
1767년, 버마(현재의 미얀마)가 태국을 침략, 당시 수도였던 아유타야(ayuttaya)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아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 포로 중에 '카놈 똠'이 있었다.
1774년 버마의 왕이었던 망그라(mangra)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저
있는 파고다를 위해 랑군 에서 일주일간 공양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이 행사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혀있던 무에타이 선수들과 버마 선수의
시합 을 마련했다. 그는 또 '리카이'라고 불리는 코메디 소극 형식의
검투경기 등도 지시했다.
시합 링은 왕궁 앞에 세워졌다. 축제의 첫날에 버 마의 한 귀족이
버마의 선수들을 이끌고 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왔다. 물론 왕은
버마의 선수들을 격려해주며 그들을 응원했다. 게임이 시작되어
레프리가 한 선수를 카놈 똠 이라고 소개를 했다. 포로로 잡혀온 많은
타이인들은 그를 열렬히 응원했다.
게임을 시작하자 마자 카놈 똠 이 상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춤을 추어
버마관중들을 어리둥절 하게 했다. 바로 스승과 부모 국왕에게 받치는
의식인 '와이쿠르 '[wai kruu] 였던것이다.
그리고 경기를 알리는 시작신호가 울렸을때, 카놈 똠은 상대가
쓰러질때까지 팔꿈치 공격으로 상대의 턱에 연타 를 쳐서 K.O 시켰다.
하지만 레프리는 와이크루로 버마선수가 얼떨떨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는 졌다고 할 수 없다고 판정 했고 그 결과 카 놈 똠은 9명의 거인들로
이루어진 9명의 버마선수들과 싸워야 했다. 카놈 똠은 무에타이의
명예를 위해 9명의 버마선수들과 싸우기로 했 고 그 거인들은 모두 그의
발 아래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상대는 아카이에서 그저 축제를 즐기러 왔던 코우치 였다.
그는 싸우기를 자원 했고, 카놈 똠의 무릎 공격을 받고 곧 쓰러졌다.
이에 감탄한 망그라는 그에 매료되어 돈과 예쁜 아내 몇명 중 어느쪽이
좋을지 물어 보았 고, 그는 예쁜 아내쪽을 택하여 왕은 자신의 부족출신
버마소녀 2명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유를 주어 그는 이 아름다운
아내들과 함 께 무사히 태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무에타이의 기예를 태국 국경을 넘어 선양한 최초의 인물로
간주 된다. 역사를 통 해볼때 카놈 똠은 망그라 앞에서 9명 이상의 버마
선수들을 무릎꿇게 만들어 무에타이에 감동한 왕이 태국인들은 타고난
기질이 있다고 말하게 하였다. 단 한사람이 다른 무기도 없이 맨 손으로
너끈히 여러상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천부적인 자질은
거의 마술적 인 것이었으며, 이렇게 무에타이의 첫번째 신화가 탄생했다.
전설이있다. '나이 카놈 톰'이 아닌 '카놈 똠'이 그의 이름이며 별명이다.
'나이'가 뜻하는 것은 영어에서의 '미스터'이며 '카놈 똠'은 태국음식의
이름이다. '카놈 똠'(달작지근한 국물에 쌀이 들어있는 일종의 간식)을
그가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에 대한 얘기이다.
'나이 카놈 똠' 18세기 사람인 카놈 똠(khanom ttom)은 태국의
최대영웅이다. 해마다 3월 17일 이면 모든 무에타이 경기장에서 그를
기리 는 행사가 벌어진다.
1767년, 버마(현재의 미얀마)가 태국을 침략, 당시 수도였던 아유타야(ayuttaya)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아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 포로 중에 '카놈 똠'이 있었다.
1774년 버마의 왕이었던 망그라(mangra)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저
있는 파고다를 위해 랑군 에서 일주일간 공양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이 행사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혀있던 무에타이 선수들과 버마 선수의
시합 을 마련했다. 그는 또 '리카이'라고 불리는 코메디 소극 형식의
검투경기 등도 지시했다.
시합 링은 왕궁 앞에 세워졌다. 축제의 첫날에 버 마의 한 귀족이
버마의 선수들을 이끌고 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왔다. 물론 왕은
버마의 선수들을 격려해주며 그들을 응원했다. 게임이 시작되어
레프리가 한 선수를 카놈 똠 이라고 소개를 했다. 포로로 잡혀온 많은
타이인들은 그를 열렬히 응원했다.
게임을 시작하자 마자 카놈 똠 이 상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춤을 추어
버마관중들을 어리둥절 하게 했다. 바로 스승과 부모 국왕에게 받치는
의식인 '와이쿠르 '[wai kruu] 였던것이다.
그리고 경기를 알리는 시작신호가 울렸을때, 카놈 똠은 상대가
쓰러질때까지 팔꿈치 공격으로 상대의 턱에 연타 를 쳐서 K.O 시켰다.
하지만 레프리는 와이크루로 버마선수가 얼떨떨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는 졌다고 할 수 없다고 판정 했고 그 결과 카 놈 똠은 9명의 거인들로
이루어진 9명의 버마선수들과 싸워야 했다. 카놈 똠은 무에타이의
명예를 위해 9명의 버마선수들과 싸우기로 했 고 그 거인들은 모두 그의
발 아래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상대는 아카이에서 그저 축제를 즐기러 왔던 코우치 였다.
그는 싸우기를 자원 했고, 카놈 똠의 무릎 공격을 받고 곧 쓰러졌다.
이에 감탄한 망그라는 그에 매료되어 돈과 예쁜 아내 몇명 중 어느쪽이
좋을지 물어 보았 고, 그는 예쁜 아내쪽을 택하여 왕은 자신의 부족출신
버마소녀 2명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유를 주어 그는 이 아름다운
아내들과 함 께 무사히 태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무에타이의 기예를 태국 국경을 넘어 선양한 최초의 인물로
간주 된다. 역사를 통 해볼때 카놈 똠은 망그라 앞에서 9명 이상의 버마
선수들을 무릎꿇게 만들어 무에타이에 감동한 왕이 태국인들은 타고난
기질이 있다고 말하게 하였다. 단 한사람이 다른 무기도 없이 맨 손으로
너끈히 여러상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천부적인 자질은
거의 마술적 인 것이었으며, 이렇게 무에타이의 첫번째 신화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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