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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2장 13-22절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4]

작성자작은목회자|작성시간26.06.08|조회수4 목록 댓글 0

말 씀   마가복음 2장 13-22절

제 목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4]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울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며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노력 해도 사람이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죄와 사탄의 굴레를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벗겨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중에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권면해 주는 가족과 스승을 만나기도 하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인생의 늪에서 건져주는 믿음의 형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셨지만, 은혜를 은혜로 받는 것은 받는 사람의 몫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관계를 밀접한 관계로 만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말씀을 듣는 것도 그 말씀을 지켜내고 말씀대로 사는 것도 모두 본인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로 달려온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치유를 받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던 귀신이 떠나가는 놀라운 기적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적을 보고 기뻐하는 정도로만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응답 받자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4-5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을 때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 때, 네 명의 사람이 정도가 심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무리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에도 병자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밖에 없다고 생각 했는지 예수님이 계신 지붕을 뜯고 들 것을 내렸습니다.

 

그 간절함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보다 그 병자를 살리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네 사람의 사랑과 열심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행동이 바로 희생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며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문제만 들여다보고 힘들어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기 보다는 이들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겠다는 적극적인 믿음을 보인다면 예수님께서는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와 병마는 바로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사탄과 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사탄과의 관계를 끊어 주시며 죄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치료받는 그 자리에는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가라는 말씀과 치료받은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적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을 책잡았습니다.

하나님만 죄를 사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네 죄를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신성 모독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일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키며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에 있을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치고, 부활 후에는 보상을 받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메시아적 소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는 편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료하며 율법을 무시한데 대한 분노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푼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극단적인 모습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사탄이 가진 절대적인 무기를 빼앗는 것이며 사탄을 향한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씌운 죄의 사슬을 끊어 주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안에 살도록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를 사해주신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핍박하며 대적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24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믿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실제 삶에 적용한 믿음으로 인해 받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버리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지만 사람들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영적 승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말씀 한마디에 사람을 종으로 부리고 있던 귀신이 떠나가고, 군대마귀가 돼지 이천마리에 들어갔던 사건을 절대로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죄의 사슬에 묶여 있던 병자였지만 우리를 둘러메고 예수님께 나아온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의 자리로 인도해 준 믿음의 형제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가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행보를 옮기셨던 예수님께서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자 그는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레위는 12사도중 하나인 마태인데, 레위는 본명이고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뒤 받은 이름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는 갈릴리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 때 세리로 일했습니다.[지도]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곳은 헤롯 빌립의 관할지인 데가볼리에서 오는 여행자들이 갈릴리와 유대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입니다.

 

마태는 가난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교량이나 운하 그리고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일을 했습니다.

세금을 임의로 과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원망과 경멸 증오를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에 자신이 세리였다는 것을 솔직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은 그런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변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이기 때문에 큰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리인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가 말씀을 들으면 완전히 달라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즉시 순종했고, 자기의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의 친구인 세리와 죄인들을 다 청해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세리였던 레위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재물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베드로나 안드레처럼 배를 버리는 차원이 아니라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자신의 소유와 명예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이 모임 후에 유대인의 공격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친구들까지 초대해서 말씀을 듣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태의 초대를 받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온갖 수탈을 일삼던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태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앞에 앉은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모든 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관세를 마음대로 걷어들였는데 이런 수입은 황제의 국고로 바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 즉 갈릴리에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먼저 들어갔습니다.

 

정해진 세금을 로마에 바치고 남은 여분을 그들이 가졌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백성을 잔인하게 괴롭힌 것입니다.

그런 세리들이 지금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들은 천민 계층이었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창기들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비 웃음거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창기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떻게 살아왔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듣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영혼만 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보면,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말씀을 들으면서 죄를 회개했을 것이고 하늘의 큰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리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을 경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동등하게 아니 그들보다 더 귀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든 서기관이든, 왕이든 종이든 상관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진리는 구원을 받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천국의 삶을 살라는 선물이기 때문에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과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조롱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처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죽도록 헌신해도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겸손한 자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세리와 창기들과 병자들을 찾아 오신 것처럼, 성도들은 회개하고 싶어도 진리를 몰라서 회개할 수 없는 죄인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1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습관에 따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하였습니다.

 

구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을 정해서 매번 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도리어 율법에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법을 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경건한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자기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자 이것을 본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당당히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금식이 옳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왜 금식을 해야 하는지, 지금 무엇을 위해서 금식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므로 금식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보이기 위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신실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혈기를 이길 수 없고, 욕심을 감당할 수 없으며 영적인 싸움에서 흔들릴 때가 있기 때문에 육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습관적으로 해서는 안되며, 자랑을 위해서 금식해서도 안됩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와 손님들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혼인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금식을 한다는 것은 큰 실례이며, 율법에서 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과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알아듣는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 하였노라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는데, 잔치 마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에게 데려다 주고 떠나는 것으로 혼인잔치는 끝이 납니다.

 

일주일 동안 행해지는 잔치는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지므로 이 날이 금식일이라 할지라도 금식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신랑인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은 크게 기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쁜 날 슬픔을 표하는 금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랑이 강제로 죽는 그 날, 즉 십자가를 지는 그 때는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선포되는 말씀을 제자들은 열심히 먹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면 그 때는 원치 않아도 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영의 양식을 비축해야 하는 때이므로 금식에 대해 잘 판단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21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진리가 어떻게 다른지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조각을, 율법주의 구조와 형식을 위주로 하는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낡은 옷에 붙인다면 낡은 옷은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율법주의와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과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은 자가 없다고 하시며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식과 전통에 매여 있는 유대교가 아닌 교회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들은 스스로 법과 형식을 만들어서, 예수님께서 벗어나게 하신 그 형식에 성도들을 가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베 조각을 다시 낡은 옷에 붙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생명력이 폭발하는 복음을 낡은 가죽부대에 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며, 사람이 만든 법이나 형식에 매여 진리를 왜곡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방종하라는 것이 아니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깨닫기만 하면, 율법주의자보다 더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철저한 신앙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여러분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를 부탁드립니다.

 

20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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