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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3장 13-19절 제자들의 사명[5]

작성자작은목회자|작성시간26.06.23|조회수2 목록 댓글 0

말 씀   마가복음 3장 13-19절

제 목   제자들의 사명[5]

 

율법은 예수님의 대속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식으로 익혔고,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법적 제한 조항에 사람들을 가두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온전히 깨달았다면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도 전혀 생각을 바꾸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감정, 배운 지식의 태두리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진리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가르쳐도 나는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자신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내 생각이 옳다고 하면서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길을 걷게 하므로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번쯤 율법이 긍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걸어 갈 때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자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고 예수님께 항의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항의한 것인데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전 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 지켜야 하는 규정은 39가지인데 몇가지만 추리자면 바느질 매듭짓고 풀지 않기, 글자 2개 이상 쓰고 지우지 않기, 요리하지 않기, 전화 컴퓨터 전기제품 조작하지 않기, 돈거래, 엘리버이터 버튼 누리지 않기, 바느질한 것 뜯지 않기, 운전하지 않기, 전등켜고 끄지 않기, 무거운 물건 옮기지 않기, 농사일 하지 않기 등등]

 

보기만 해도 너무 유치한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얽매여 놓은 것입니다.

규정대로 살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함에도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 하였던 것입니다.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행위는 타작에 해당 되며, 이삭껍데기를 입으로 부는 행위는 정미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23장 25절에 보면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는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죄가 아니라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 것이 죄가 된다고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잘못을 예수님과 엮어서, 다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반 율법적인 행위를 빌미로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호시탐탐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배가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살펴서 서로 돕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일입니다.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은 주지 않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책망하는 바리새인들의 강퍅함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의 그런 행동이 바로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이제 안식일의 관행이 새롭게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생각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나이며,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 하신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을 뿐 아니라, 안식일의 논쟁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형식적인 안식을 물리치고 진정한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인생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시며 참 안식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것처럼 안식일 역시 온전히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즉 날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사람이 안식일 즉 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려서 율법을 범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 상관하지 않던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자 그들은 대답 하지 못했습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비유로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정신은 사랑과 자비이므로 안식일에도 양을 살리는데, 양보다 귀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다 아시면서도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기를 집요하게 바라는 그들의 신앙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그들의 생각을 다 알면서도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들이 지키는 법조문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그들의 심령은 이미 완악하므로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선적이고 편파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자비로운 일인가, 합법적인 것인가 묻고 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의사는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메시아를 만나고도 변하지 않는 그들과 우리들의 모습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폭 넓게 판단하지 않고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우리들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산과 바다를 다니시며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습니다.

 

제자 중에는, 베드로처럼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벌거벗은 채 도망치던 마가도 있었으며, 재정을 맡아 헌신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았던 제자들이 성장하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렇게 메시아의 사역을 잘 이해하고 전하는 제자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 당시에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목회자 혼자 말씀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구역장을 세우고, 직분 자를 세우는데 이것은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동역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사로 부름 받은 구역장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교회에 혼란만 줄 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배운 대로 전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사는 영혼구원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이므로 진리를 완벽하게 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노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신 것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역시 잘못하면 이런 책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기적을 보자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교만한 말과 행동을 하였고, 권력을 탐하여 예수님을 파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직분을 권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교만해 질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될 것이고 헌신한 만큼 세상의 복을 받으려는 욕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버린 믿음의 깊이에 따라 쓰임이 다르고 받는 은혜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하게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의 이름은 베드로와 큰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와 빌립, 바돌로매와 마태, 도마와 작은 야고보, 다대오와 시몬, 그리고 가룟유다입니다.

 

제자들이 부름을 받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며 평범한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사도가 된 그들의 마지막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하면 제자들을 더 처참하게, 더 지독하게 죽일 것인지 고민한 것처럼 제자들의 순교 현장은 처참했습니다.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과연 이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가는 곳마다 기적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용사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절대로 알 수 없는 특별한 영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며 구제하기를 멈추지 않고, 믿음과 말씀과 기도로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마가는 14-15절에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세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고, 세상으로 보내서 전도하게 하며, 귀신을 내 쫓는 권능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확실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으므로 사탄과의 전쟁에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겠다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마음이 떠났을 때 그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핍박을 당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신했고 외면했으며, 진리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탄의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를 부르신 두번째 이유는 전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라는 원어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사도가 받은 사명은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부른 제자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그의 죽음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전도를 통해 증거 되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로 전한 복음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므로, 이제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성도들이 연합할 때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심령 역시 선한 믿음을 쌓아야만 아름다운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세번째 이유는,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께 책망을 듣기도 했지만, 점차 믿음이 성장하자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는 기사와 표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제자들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확신을 가짐으로 담대하게 사탄과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성도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것은 죄를 사함 받은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며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목적도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자리에서 말씀대로 인내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면 당연히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탄을 대적해야 하지만 그것조차 성령께서 사탄을 직접 상대해 주실 것이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늘 함께 계셨고, 전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쳐 주셨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특별한 은사와 권능을 주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를 가룟유다가 지키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재정을 담당하며 헌신했지만, 자기 사랑과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지상 왕국이 세워지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고 제자라는 소중한 자리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릴찌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잡혀갈 때 도망쳤고, 가야바의 집에서 핍박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피로 물든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담대한 신앙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두려워서 예수님의 희생 뒤에 숨어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한 입으로 쓴 물과 단물을 낼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닭이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조차 잊고 배신하는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큰 권세를 가질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이제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예수님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려도 자기는 끝까지 남겠다는 베드로의 고백이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지금 예수님을 버린 결정은 자신이 한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을 보면서도 살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지나간 세월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당시에는 옳다고 했던 행동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렸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어리석은 선택인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조금만 더 생각하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고 소중한 것들을 버리는 실수를 할 때가 있으므로 늘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두렵다고, 감당하기 힘들다고,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손해 보는 것 같다고, 쉽게 포기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가치 없다고 쉽게 버린 것을 다시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에 지금 잘 판단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마지막 순간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행복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섬겼을 때,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가 너도 예수와 같은 당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순간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수 많은 기쁨과 슬픔이 지나갔지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순간이 가장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끝까지 기억 속에 남아 절대로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죄는 또렷하게 남아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다른 모양으로 비춰지면서 더 깊은 회개를 하도록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기억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진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방패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죽음을 보면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이 달랐던 것처럼 여러분의 결정이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죽도록 회개했던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반면 회개하지 않았던 가룟유다는 사도의 직분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 대신 뽑힌 맛디아까지, 12제자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각오를 하자 핍박 받는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다가 거룩한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렇게 순교한12제자가 있었기 때문에 신약교회는 부흥할 수 있었고,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처럼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말고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며 악한 영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로 살아 가기 바랍니다.

 

 

202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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