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프가 있는 풍경
수항골 박물관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펌프가 서 있다
검게 녹이 슨 몸체와 손때 묻은 손잡이는 이제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아니라 시간을 길어 올리는 박물관의 전시물이다
그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이 먼저 걸어 나온다
수도꼭지를 비틀면 물이 나오는 세상에서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쇳덩어리일 뿐이겠지만 우리 세대에게 펌프는 삶이었다
우물물 깃던 시절 펌프는 신세계였다
철컥컬컥 손잡이의 쇳소리는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 였다
긴 두레박으로 퍼 올리던 우물물을 금세 퍼올리는 저 등의 이두박근은 생생한 살아있음 이었다
새벽이면 어머니가 물을 길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던 곳이었다.
여름에는 수박을 담가 놓던 냉장고였고, 겨울에는 손등이 얼얼하도록 찬물을 퍼 올리던 놀이터였다.
하지만 펌프는 욕심 많은 사람에게 물을 내주지 않았다.
먼저 마중물을 넣어야 했다.
한 바가지의 물을 기꺼이 내어주어야만 땅속 깊은 곳의 물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이치를 몰랐다.
물을 얻으려는데 왜 물을 먼저 넣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세상도 그렇다는 것을.
사랑도 먼저 주어야 돌아오고 정성도 먼저 건네야 열매가 맺힌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 마음의 마중물이 되고
먼저 내미는 손 하나가 관계를 이어주는 물길이 된다
수항골 박물관의 펌프는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땀과 어머니 세대의 사랑을 품고 있는 기억의 샘이다.
녹슨 손잡이를 바라보면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들이 다시 들려온다.
물동이를 이고 가던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 장난치며 펌프질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저녁 연기 피어오르던 고향 풍경까지 함께 되살아난다
박물관은 낡은 물건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다
잊혀가는 마음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항골 박물관의 펌프는 오늘도 말없이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지금 누구의 마중물이 되어 주고 있느냐고
나는 펌프 앞을 지날 때마다 손잡이를 한번 잡아 보고 싶어진다
혹시 모르겠다
오래된 펌프에서
그리움 한 바가지는 다시 콸콸 쏟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