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가 되신 하나님 (고난주간 6- 금요일)
찬송 : 찬461장(십자가를 질 수 있나)
성경 : 막15:1-47절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영원한 생명을 잃고 유한한 세상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사단의 종노릇하며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이 깨어진 그릇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을 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육체로 보내주셨다.
그것만 해도 놀랍고 감사한데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금요일에 이르러 죄인처럼 붙잡혀 불의한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후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 이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가보며 주님의 그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이고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런 길을 걸으셔야 했는지를 묵상해 보려고 한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가 잠도 주무시지 못한 채 밤새 심문을 당하시고 새벽에 죄인으로 결박되어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다.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날 제자들, 배신하여 팔아버린 제자들, 한 시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실망스런 제자들을 향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며 마지막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에게 붙잡혀 한 밤중에 공회에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증거를 찾았다. 마14:55-56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산헤드린 회원들은 야간 회의를 위해 급히 모였다. 낮에만 재판을 허락하는 유대이들의 엄격한 법적 재판 과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들은 새벽 이후에 공식적인 인가를 받아야 했음에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정식 재판의 절차도 무시한 채로 예수님을 밤새 심문하고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이다. 오늘날 변호사가 있고 정식 재판이 있다면 이들의 의결 자체가 불법이기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판결 자체가 불법이 되어 예수님은 무죄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불법의 재판을 당하시며 밤새 한잠을 주무시지 못하시고 새벽에 예수님은 두 번째 결박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이다. 우리가 죄로 인해 결박당하고 불법의 세상에서 휘둘려야 할 것을 아시고 주님이 친히 그 길을 걸으신 것이다. 오늘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불법의 일들이 벌어져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이 많은가?
그들의 아픔을 아시고 주님은 그렇게 불법적으로 체포되고 불법적으로 심판을 당하시고 결박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법에 충분히 항거하고 불법을 이기실 수 있는 주님은 이런 불법의 현실에 묵묵히 붙잡히시고 심판당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며 받아들이신다. 3-5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으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주님은 숫자를 셀수 없는 고발장들이 난무하는 거짓말들속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발과 무고한 정죄를 당하며 인생을 살아갈 때가 많음을 알기 때문이시다. 이 모든 것이 죄로 인해 발생된 사실이기에 변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주님은 그 탁월한 변론의 실력으로 화요일 모든 변론가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던 것처럼 이 변론을 이기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변론의 시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왜 바로 거짓과 음모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변호사가 부족하여, 변론할 지식이 부족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죄로 타락하여 이 땅에서 제대로 된 변론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야 할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유월절의 전례에는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그러는 줄 알고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놀랍게도 민란 중에 살인한 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살인자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신 것이다. 14-15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만왕의 왕이신 분이 살인자처럼 취급을 당하시고 오히려 살인자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가장 심각한 죄인 그것도 로마인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넘겨주게 된다. 도대체 무슨 죄로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본문을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죄를 정죄하는 과정에 오직 ‘소리지름’만 존재할 뿐 그 어떤 정확한 죄목도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최고의 불법 재판이 진행되었음을 볼수 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재판관이 이렇게 말하고 십자가 처형을 어떻게 내린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렇게 채찍에 맞고 로마 군인들에게 십자가 사형수로 넘겨졌다. 그리고는 군인들에서 다시 고난을 받으신다. 19-20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은 이곳에서 가시관을 쓰고 희롱을 당하신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은 골고다를 향하여 가신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밤새 한 잠도 주무시지 못하시고 채찍과 희롱과 심문을 당하신 주님의 발걸음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동원하지 않고는 더 이상 움직이실 수 없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골고다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힌다. 25-27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은 오전 6시에 십자가형을 선언받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양 옆에 강도들과 함께 말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강도처럼 취급을 당하시고 모진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 과정에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다.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거절하셨다. 그분은 미리도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14:25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분은 한치앞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처럼 이 십자가의 길에서 너무 고통스러운 장면이 있을 것을 몰라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가 당해야 하는 죄값을 온전히 치루시기 위해서는 속죄에 필요한 모든 고통을 다 담당하셔야 했기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 순간의 결정이 아니셨다. 아버지의 뜻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위해 에수님은 이처럼 속죄에 필요한 고통을 다 담당하시기 위해, 아니 그 고난을 어느 것 하나도 피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셨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력을 갖고 있어서 약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 밤새 심문과 채찍과 희롱을 당하시며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신 주님은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오르시는 길을 걸어오시며 얼마나 땀에 적시며 목이 타셨을까?
그런데 그깟 몰약탄 포도주 많이도 주지 않고 불쌍해서 주는 한 모금의 몰약탄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부하신 주님의 그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간절한 헌신의 모습을 묵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토록 완벽하게 담당하셨음을 오늘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29-32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욕을 먹으셨다. 희롱을 당하셨다. 누구도 예수님의 편은 없었다. 아니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 깃발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주님은 이런 고백까지 하신다. 34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니시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제구시 그러니까 오후 3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버림속에 죽임을 당하셨다. 어떤 목사님은 이 부분을 해석하며 아들을 버린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공의의 하나님으로 인간의 완전한 죄의 속량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버리신 탕부가 되셨다는 것이다. 조금의 긍휼도 없이 완전히 심판하셨다는 말이다.
나같은 죄인의 죄악을 완전히 씻어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는 단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의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고 이토록 모진 심판을 내리셔야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십자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 ~ , 아버지 ~
이렇게 자기 백성들과 하나님에게까지 버려져 죽임을 당했을 때 한 이방인 백부장이 이렇게 고백한다. 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할렐루야!
나같은 죄인을 위해 이토록 모진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외면하신 탕부가 되셔서 나같은 죄인을 입양하신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이토록 모질게 저주하고 심판하신 탕부가 되신 하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아침이다. 아버지 ~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도대체 내가 우리가 무엇이기에 ...
아버지, 주님~ 그저 감사합니다. 이 은혜 가슴에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