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신 곳에서 (마2-6)
찬양 : 내 모습 이대로
본문 : 마3:1-6절
작은교회 돕기 프로젝트가 이제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전도할 수 없고 예배마져 드릴 수 없었던 작은교회들을 위해 신문지 한 장이 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다. 그저 우리 부르심의 자리인 작은교회의 신문지 한 장이 되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는데 50개 교회를 돕는 통로로 사용해 주시니 감사하다. 소중한 후원자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자신도 힘든데 더 힘든 교회들을 위해 마중물을 흘려 보내주신 작은교회들의 뜨거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아직도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는 요청서가 계속 오고 있어 고민이다. 주님, 인도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소서.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에는 세례요한의 사역이 그려지고 있다. 그의 사역의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일어나 놀라운 일들이 ... 1-6절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나는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흥분이 되곤 한다. 왜냐하면 유대 광야에서 외친 세례요한의 소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올 정도의 강력한 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내가 사용하는 하늘부흥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위키 백과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광야(히브리어: מִדְבַּר יְהוּדָה 미드바르 예후다, 아랍어: صحراء يهودا 사하라 야후단)는 예루살렘 동쪽에 펼쳐진 사막으로 급격한 단층이 있는 지역이다. 물론 유대 광야의 높은 지대인 미드바르는 겨울철에 양과 염소를 방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쪽과 동쪽의 외진 곳은 황무지 또는 사막이라는 뜻의 예시몬이라고 불리며 양치기들도 가기를 꺼리는 위험한 곳이다.
어느 곳이든 분명한 것은 여기서 세례요한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가 외친 복음의 핵심도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누구도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외친 세례요한의 사역은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해야 마땅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는 이렇게 유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광야의 외침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셨다. 5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온 이스라엘이 듣고 광야로 나온 것이다. 그것도 듣기 좋은 설교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이 어찌 ‘하늘부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광야에서 외친 것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내용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광야라는 장소나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의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부르신 그 자리에 부르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능력이고, 지혜이다.
가끔 작은교회 사역자들이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라는 말을 할 때면 나는 안타깝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잘못 선택하신 것이냐고 ...
세례요한을 광야에서 외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지혜가 부족하신 것이 아니라 광대한 지혜가 있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오늘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막을 수 없다. 부족하다면 하나님앞에 겸손히 구하면서 그분의 이끄심에 순종하면 된다. 그분의 더 큰 능력과 지혜가 나타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를 다시 보게 된다. 처음 나를 부르실 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숙하고, 경험도 없고, 지혜도 없었고 고집불통의 사람이었다.
그때 주님은 나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광야에서 세례요한을 통해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게 하신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도사시절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교회를 세우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능력이 아니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다. 그의 능력이 탁월하기에 광야에서 하늘부흥을 이룬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겸손히 순종하며 부르신 뜻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인 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주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부르신 그 자리에 부르신 그대로 서 있으라고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신 자리에 부르신 그대로 그것이 광야이고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안타까운 모습이어도 괜찮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원색적인 복음이어도 괜찮다고 ...
전등이 전기에 연결되어야 불이 들어오듯 사역자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의 부르심과 그분의 인도하심안에 연결되어 있어야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케 된다.
만약 세례요한이 자신이 제사장 출신이기에 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전할 것이라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그것이 실패자이다. 사람이 모이건 모이지 않건 상관없이 부르신 곳에서 부르신 뜻대로 서는 것이 부흥이며, 그것이 성경적 성공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모이게 하고 만날 수 없는 환경이기에 숫자로 말하면 지금 모든 사람이 실패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코로나 시대 유대광야와 같은 이곳에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음을 본다. 아멘.
그렇다. 나는 오늘도 부르신 곳에서 부르신 뜻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경주하며 달려가련다. 그 이후는 주님께 맡기고 작은교회의 신문지 한 장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그것을 찾아 오늘도 기쁨으로 최선을 경주할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 주님이 부르신 그대로 ...
이 찬양이 생각난다.
‘...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예배하네...’
코로나 사태가 언제까지 갈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부르신 곳에서 부르신 그 뜻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배를 만들며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갈 것이다. 주님, 오늘도 이 종을 받으소서. 오늘도 부르신 그 곳에서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오니 속히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