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이 없을 때 (시2-142)
2026년 6월 9일 (화요일)
찬양 :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본문 : 시 142:1-7
☞ https://youtu.be/Hu3BsVkStUI?si=nQrFp7H8pgDToziu
오늘 중보기도 세미나 종강의 수업이 있다. 목회사관학교에 이어서 이제 중보기도 세미나가 종강하게 된다. 마지막 수업의 시간 주님의 은혜가 참여하신 모두에게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열심히 달려오신 모두에게 위로부터 주시는 하늘의 선물들이 풍성하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의 본문 시편 142편의 표제어는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라고 나온다. 여기 마스길이란 교훈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이 시편에서 말하는 굴은 사무엘상 22장의 '아둘람 굴' 혹은 사무엘상 24장의 '엔게디 굴'로 추정된다. 굴에 있다는 것은 장소적인 갇힘을 넘어, 인간적인 모든 도움과 소망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4절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이 구절에는 <아는 이, 피난처, 돌보는 이>라는 세 가지가 없다는 다윗의 고백이 나온다. 오늘 아침 이 단어들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려고 한다.
먼저 <아는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마키르(מַכִּיר)로 '알아보다, 인정하다, 주목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카르(נָכַר)'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위기의 순간에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변호해 주는 법적, 관계적 인정을 뜻한다.
고대 이스라엘 재판이나 전투에서 '오른쪽'은 변호자나 보호자가 서는 자리였다. 다윗이 <오른쪽을 살펴보아도 나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한 것은, 사울의 추격이라는 억울하고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변호해 주거나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줄 조력자가 세상천지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뼈저린 사회적 단절을 의미한다.
다윗 역시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고 내 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핍박이 시작되자 그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비록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닐지라도, 캄캄한 굴속에 갇힌 다윗에게는 세상 모두가 자신을 버린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오늘 라마나욧선교회를 내려와야 할 지금 나도 이런 심정을 느끼고 있다. 나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여, 나를 아는 이가 없나이다.
두 번째로 피난처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노스(מָנוֹס)다. '도망치다, 달아나다'라는 뜻의 동사 '누스(נוּס)'에서 유래한 명사로, '도피처, 퇴로, 달아날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품으로서의 피난처(마하세, מַחֲסֶה)와는 구별된다. 4절의 '마노스'는 인간적인 계획이나 내 발로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비상구를 뜻한다. 다윗은 지금 사방이 막힌 굴속에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 도모할 수 있는 모든 퇴로와 인간적인 방법론이 완벽하게 차단된 물리적이고 상황적인 고립에 있음을 하나님께 토로한 것이다.
이 상황도 오늘 내 모습과 너무도 흡사해 오늘 시편은 바로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세 번째로 돌보는 이란 히브리어로 도레쉬 레나프쉬(דּוֹרֵשׁ לְנַפְשִׁי)다. '찾다, 구하다, 관심을 가지다'라는 뜻의 동사 '다라쉬(דָּרַשׁ)'에 '나의 생명, 영혼'을 뜻하는 '네페쉬(נֶפֶשׁ)'가 결합된 형태다. 직역하면 "나의 영혼을 찾아주는 자, 내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이다.
보통 시편에서 "내 영혼을 찾는 자"는 생명을 해치려는 원수들을 가리킬 때가 많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네가 지금 굴속에서 얼마나 두렵니? 춥고 배고프지 않니?"라며 다윗의 안위와 생사에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내 존재의 가치를 알아주고 내 아픔에 공감해 주는 이가 없다는 가장 깊은 정서적, 실존적 버림받음의 자리다.
원수들은 다윗을 찾아 엄청나게 다가오지만, 그와 반비례로 다윗을 공감하며 그를 찾아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도 오늘 내 모습이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보통의 경우는 주저앉기 딱 알맞은 조건인데, 다윗은 이런 순간에 이 아픔을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진술한다. 1-2절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여기에서 다윗은 소리 내어 부르짖고 간구한다.
이것은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더 이상 속으로 감출 수 없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본능적이고 절박한 비명을 의미한다. 생명의 위협으로 모든 것이 단절된 '굴' 속에서 체면이나 형식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살려달라는 날 것 그대로의 절규가 음성(소리)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는 이 아픔을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진술한다.
2절의 "토로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파크(שָׁפַךְ)'다. 이 단어는 본래 '액체를 쏟아붓다, 엎지르다'라는 뜻인데 주로 구약성경에서 제단 밑에 피를 쏟거나(레 4:7), 물을 땅에 쏟을 때(삼상 7:6) 사용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 근심, 불평을 뜻하는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쏟아붓고 있다. 그릇에 담긴 물을 엎지르면 한 방울도 남지 않듯이, 내면에 고여 썩어가고 있는 두려움과 절망, 상처와 분노를 조금의 숨김이나 포장 없이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비워내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고백이다.
또 다윗은 "진술하리이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나가드(נָגַד)'의 사역형(Hiphil) 동사로 '분명하게 알리다, 설명하다, 눈앞에 펼쳐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다.
법정에서 증인이 판사 앞에서 사건의 경위를 명확하게 보고하고 진술할 때 쓰이는 단어다. 다윗은 지금 감정적으로 울부짖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면한 '환난(히브리어: צָרָה, 차라)'의 실체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져와 조목조목 낱낱이 아뢴다.
그의 기도는 한 맺힌 기도나 눈물을 흘리는 맹목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과 맺는 인격적이고 이성적인 소통의 기도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하였기에 이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그를 핍박하는 자들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오늘의 솔직한 상태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진술한다. 그러면서 의인이 나를 두를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편이다.
분명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를 아는 이 없고, 피난처도 없고, 돌보는 이도 없는 것 같은 상황이다.
감히 다윗과 비교할 상황은 전혀 아니지만 ~
분명한 사실은 다윗은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는 나의 피난처라고 열린 하늘길을 내었는데 오늘 나는 열린 하늘길을 향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다.
이런 나를 주님은 다윗의 마스길로 교훈하시며
나를 아시는 분, 나의 유일한 피난처,
그리고 오늘도 나의 영혼을 찾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나오라고 두 팔을 벌려 외치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주님 ~ 당신의 친절한 팔에 안기겠습니다. 그 영원하신 팔 그 능력의 팔에 안깁니다. 주님 ~ 언약하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 종을 기름부으소서. 이제 의인들이 나를 두르게 하실 주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한줄 묵상 :
<세상의 모든 피난처와 위로가 차단된 고독의 굴은, 오직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분깃이심을 깨닫게 하는 거룩한 지성소입니다>
적용 질문 :
1. 지금 내 삶에서 사방이 막힌 '굴'과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위로나 인간적인 비상구를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있습니까?
2. 오늘 다윗처럼 내 영혼의 밑바닥에 있는 감정의 찌꺼기까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내며, 조목조목 진술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3. 주님이 나를 아시고, 피난처를 예비하시며 두 팔 벌려 나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