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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묵상] 혈과 육을 입으신 예수님 : 히브리서 2장

작성자라마나욧|작성시간26.06.19|조회수37 목록 댓글 0

혈과 육을 입으신 예수님 (3-2)

2026619(금요일)

찬양 :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본문 : 2:1-18

https://youtu.be/FMqEJSFm_lY?si=geanm3l2q4saLxth

 

어제는 중보기도 세미나 교재를 마지막 수정 편집을 시작했다. 한 주간 수정 편집을 통해 영적 전쟁과 중보기도란 교재를 완성한 후 다음 교재를 제작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작은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이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은 금요일 김성일 목사님을 모시고 금요세미나가 계속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마음 모아 기도한다. 저녁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살펴볼 히브리서 2장은 지극히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깊이 조명하는 장이다.

 

1장에서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의 탁월성을 확인한 유대인 개종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신학적인 심각한 질문이 던져졌다.

 

<그토록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천사보다 못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는가?>

 

당시 핍박받던 성도들에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의 조롱거리였다. 유대교로 돌아가면 번듯한 성전과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기독교는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이 실패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필연적인 지혜였음을 논증한다.

 

히브리서 2장은 이 부분을 세 가지의 흐름으로 전개한다.

첫 번째는 들은 말씀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기 '유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세케인(προσέχειν)'은 배를 항구에 단단히 정박시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반대로 '흘러 떠내려가다(παραρρυέω)'는 닻을 내리지 않은 배가 물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목적지에서 멀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갑작스러운 배교''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분노'가 아니었다. 핍박에 지치고, 가난에 쪼들리며, 일상의 고단함에 치이다 보니 그저 복음을 '등한히 여기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노를 젓지 않으면 배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다. 우리의 영적 본성도 이와 같아서, 의식적으로 말씀에 마음을 동여매지 않으면 시대의 풍조와 현실의 타협점이라는 거센 조류에 소리 없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 라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초대교회 성도들로 말씀에 유념하지 않고 흘러 떠내려 가게 하는 매우 위험한 문제였기에 히브리서는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이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도록 경고한 것이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성육신하신 이유를 말씀한다.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잠시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만유의 상속자이시며 창조자이신 예수님께서 유한한 육체를 입고 스스로 천사보다 작은 존재가 되셨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작아지심'은 결코 힘이 없어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신 가장 위대하고 의도적인 자발적 낮아짐이었다.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과 저주라는 쓴잔의 밑바닥까지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의식적으로 온몸으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이 주는 끔찍한 절망과 고통을 남김없이 들이마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친히 그 공포의 한복판을 통과하신 대제사장의 극진한 사랑이다.

 

세상은 높고, 화려하고, 커지는 것에서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실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가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 스스로 작아지고 낮아지신 길'이었음을 알게 한다.

 

세 번째로 이 결과를 보여준다. 구원의 창시자가 되게 하시며,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 위함이며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의 세력 잡은 자에게서 자유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강조한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낮아지시고 고난을 겪으셨기에, 지금 우리의 연약함과 고단함, 그리고 현실 앞에서 작아지는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시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17-1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입고 기꺼이 형제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 어떤 캄캄한 상황에 놓일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다.

 

오늘 은퇴의 자리로 본격적으로 내려가는 내게, 만유의 주재이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먼저 내려오사> 형제가 되어주셨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먼저 내려오신 이 주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다가올 시간을 막연한 두려움에 종노릇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이 작아짐의 길을 먼저 걸으셨고, 그 길 끝에서 영광의 관을 쓰셨다. 그렇기에 내가 내려가는 이 길에서도 주님은 능히 나를 도우시며, 마침내 이 길을 생명의 길이 되게 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 길을, 아무 보장도 없이 이 나이에 걸어간다는 것은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두려움과 온갖 생각들로 흔들곤 한다. 거센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들은 이 말씀을 더욱 유념해야 하는지' 뼛속 깊이 깨닫는 아침이다.

 

오늘도 주님이 친히 이루신 이 큰 구원을 내 마음에 단단히 닻으로 내린다. 기꺼이 나의 형제가 되어주시고, 그 어떤 캄캄한 상황에서도 능히 나를 도우시는 대제사장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당당하게 두려움을 마주하며 걸어 나가는 하루가 되련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 보장 없이 내려가야 하는 이 두려운 길은, 나를 구원하시려 만유의 주께서 '먼저 내려오신' 가장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길이란 사실이다.

 

주님, 보이는 세상에 살다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주님이 걸으신 그 길임을 알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오늘도 나아갑니다. 내겐 주님의 말씀밖에 없으니 나를 도와주소서.

 

한줄 묵상 :

<아무 보장 없이 내려가야 하는 이 두려운 길은, 나를 구원하시려 만유의 주께서 '먼저 내려오신' 가장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길이다.>

 

적용질문 :

1. 일상의 고단함이나 불확실한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내 마음이 말씀의 닻을 잃고 세상의 조류로 '흘러 떠내려가고' 있는 영역은 없습니까?

 

2. 나를 위해 '먼저 낮아지시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위로와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3. 능히 도우시는 대제사장을 의지하여 오늘 내가 '당당하게 마주하며'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믿음의 태도나 결정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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