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란다고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릴 때에는,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면,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줄 압니다.
또 그렇게 어른들에게 교육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며 세상과 부딪히면서,
자신이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것도,
때론,
아무리 기도하고 애원해도 이루어지지 않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설사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순간 그것뿐이지,
바래는 것마다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삶의 전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나의 뜻과 무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그 원망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여
심지어는, 남을 해치거나 살인을 하거나
자신의 생명까지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고 바라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절친했던 사람의 아들 녀석인데,
약 10여 년 전쯤,
그 녀석이 고등학교 2-3학년 때에, 자신에게 닥쳐진 삶의 무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그 녀석의 엄마에게 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엄마, 엄마는 자신만이 주인공인줄 알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주인공이야.
만화나, 연극이나 영화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고, 엑스트라가 있어서,
주인공을 위해서 다른 모든 이가 희생을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에는 모두가 다 주인공이거든…….”
라고 자기 엄마를 달랬다고, 그 녀석의 엄마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죠. ^^
맞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주인공으로 착각합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바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착각을 합니다.
그 착각 때문에 간절히 바라면,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여서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바라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마음이란 놈은 현실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늘 제 마음대로 주인공이 되려하니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또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자신을 덜 사랑해준다고,
즉,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가까운 이들이나 자신과 이해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모든 삶에 대해서 독을 내뿜기도 하는 것입니다.
삶이 그러하지 않는 경우를
저의 경우로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택시를 하기 때문에,
택시를 예로 들면,
손님이 없어서 한참이나 빈 택시로 돌아다니다가,
어떤 네거리에서 상상을 합니다.
‘오른 쪽으로 가면 아마 손님이 있을 거야,’ 라고요.
물론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에 기초한 생각이죠.
그래서 그곳으로 핸들을 틉니다.
그러나
손님이 있고 없고는 손님의 몫입니다.
나의 상상으로 손님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설사 손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나와 같이 생각을 하고 온 다른 빈 택시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해서 흘러가지만,
모두가 그렇게 선택해서 살아가기에,
서로 부딪히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수가 있고,
또 내가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해 주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세상은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맘에 들게 끔만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 곳에서 손님을 태울 수도 있고 못 태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이 있어서 태워도 옳고,
없어서 못 태워도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란 놈은,
태우면 좋아하고,
못 태우면,
“에이 씨... 뭐 이래.”
하고 투덜댑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의식속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와야만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손님이 있어서 태워야 옳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만 식성이 풀린다는 말입니다.
이 것 역시 과거에 기초한 믿음이죠.
특히, 어릴 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모가 무조건 준 사람은
더 심할 것입니다.
즉,
현실을 과거의 기억으로 착각대로 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착각과 냉정한 현실 때문에 삶을 원망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바라는 그 마음이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과연 그 마음이 과연 우리의 생각을 마음대로 합니까?
우리의 육체를 마음대로 합니까?
우리가 바라지 않는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러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바라는 그 놈이 주인이라면,
우리는 병도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피로함도 생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중풍이 들어서 몸에 마비가 왔다고 하더라도,
금방 새 몸처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그 마음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그 바라는 그 마음이,
주인처럼 그렇게 합니까?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그 토록 믿고 있는 그 마음이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정말로 안다면,
그 마음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번만 자신의 믿음과 현실을 자세히 정확하게 바라보기만 한다면,
현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믿음이나 상상은 실재하는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생각 속에만,
그것도 과거의 기억으로 만든 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
잘못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려서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기억 위에 기초한
자신의 믿음이나 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스스로 힘들어하기도 하고,
남을 원망하거나 해치기도 하고,
때론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요.
즉,
주인이 아닌 허상을 주인처럼 믿고 그 말에 속아 사는 것이지요.
하긴 그것 때문에 진정한 삶에 대한 구함도 시작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진정으로 한번만이라도,
아무리 간절히 원하고 바라더라도,
그 바라는 놈이 주인이 아니라 허깨비요.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다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다시는 그 놈에게 속지 않을 것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바로 진정한 실체적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정하고 받아들임
그것이 바로
그 바람의 진정한 열매인 것을 알 것입니다.
비록 그 열매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너무나 엉뚱하고,
동떨어진 괴상망측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열매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 열매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바람과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열매는 아니고,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는 영 다른 열매이지만,
그 열매를 받아들일 때에,
자신에게 참 많은 자유와 평화와 휴식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옵니다.
현실을 받아들임,
자신의 믿음과 바람이 문제였음을 인식,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편안해짐,
이것은 시차적인 차이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오는 것입니다.
즉,
받아들임,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오는 것은 보림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깥의 삶뿐만 아닙니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든 생각과 감정 역시,
우리가 정해놓은 어떤 아름답고 거룩하고 바른 것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르고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하고,
또 보시를 하고
수행에 용맹하고
사랑하고 살려고 해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욕심과,
화냄과
미움과
원망과
인내하지 못하는 밴댕이 같은 속과
짜증과
게으름과
수행에 용맹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떻게 하려는 그 놈이 진정한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놈은 바로 과거에 만들어 놓은,
분별하는 마음이 만든 허깨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하는 그 마음 역시 허깨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현실의 자신의 모습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그 모습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인은,
순간순간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그 무엇입니다.
그 못나고 부족한 그 모습,
그것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그 토록 찾던 모습이
그 토록 찾던 부처의 모습이
바로,
욕심 많고,
화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밴댕이 속을 가지고 있고,
짜증이나 내고,
게으름에 빈둥대기도 하고,
수행하다 침을 흘리며 졸다가 앞이나 옆으로 픽 쓰러지기도 하는
그 모습!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모두 다 받아들이고,
일어나고 사라지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이라고 하니, 그 무엇이 따로 어디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면 또 어긋납니다.
매 순간,
그것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것에 의하여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위에서 말한 그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 무엇과 그 모습이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는 그 삶! 그 모습!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
그것이 바로 부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별하는 눈만 버리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이 잘못되었다는 그 한마음만 내십시오.
자! 보십시오.
분별하지 않으면 욕심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화가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원망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인내하지 못하는 밴댕이 속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짜증을 내는 것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게으름으로 빈둥대는 것이 왜 나쁘지요?
분별하지 않으면 수행하다 침을 흘리며 졸다가 픽 쓰러지는 모습이 왜 나쁘지요?
또,
분별하지 않으면 욕심이라는 말이 생기겠어요?
분별하지 않으면 화라는 말이 생기겠어요?
분별하지 않으면 미움이라는 말이 생기겠어요?
원망, 밴댕이 속, 짜증, 게으름, 등등의 말이 생겼겠어요?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분별된 이름일 뿐입니다.
욕심, 화, 미움, 원망, 밴댕이 속, 짜증, 게으름, 수행 등등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자성의 성품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성의 평등함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바램보다
자신 앞에 일어난 것을 받아들여보세요.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 때에,
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그 마음을 자세히 보세요.
무엇이 문제인지…….
현실이 문제인지 자신의 마음이 문제인지…….
힘들어하는 것이 어느 놈인지,
현실인지 자신의 마음인지요…….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