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칼잡이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배가 강의 중간쯤 갔을 때에
갑자기 배가 출렁거리는 바람에
그가 차고 있던 칼이 칼집에서 빠져 나와 강물에 풍덩하고 빠져버렸다.
그는 급히 차고 있던 작은 칼로 배의 옆 언저리에 칼이 빠진 지점에 표시를 하고는
“여기가 내가 칼을 빠뜨린 지점이다.”
라고 하고는,
배가 건너 강나루에 도착하자
그는 칼을 찾으려 배에 새겨진 지점에 뛰어들었다.”
각주구검(刻舟求劍 : 배에 새겨서 칼을 구하다.).
왕희지가 난정서(蘭亭序)를 쓸 때에의 이야기다.
당시 회계내사이자 우군장군이었던 왕희지가
자신의 아들 7명과 더불어 선비들과 명사(名士) 등 41명의 동진(東晋)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회계현(會稽縣 : 지금의 절강성의 소흥현) 난정이라는 곳에 초대하여 대규모 연회(宴會)를 열었는데
모인 사람들이 서로 시를 짓는 내기를 하여, 술잔이 물에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못 지은 사람들은 벌주를 마시게 했었는데,
시를 지은 사람이 자신을 포함하여 26명이었고,
시를 못 지은 사람들 15명은 벌주를 마셨다.
그 날 시를 지은 사람들의 시를 모아 철(綴)을 하고는 그 시집의 서문(序文)을 왕희지가 쓰게 되었는데,
그 서문이 그 유명한 ‘난정서’이다.
왕희지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문방사우를 준비하고 먹을 갈아 썼는데 정말로 명필 중의 명필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이 깨어서도 그렇게 쓸 수가 있는가 싶어 맨 정신으로 수없이 썼지만 그 글씨를 능가 할 수가 없었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주역의 근본이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이 우주 만물의 근본 이치인 연기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날 어느 시점에 어떤 일을 해서 어떤 결과를 얻었다는 것은,
그 날, 그 시점에, 그 일을 해서 그 결과를 얻은 것이지,
일과 결과만 생각해서 아무 때나 행한다고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과 결과만 생각하고는,
그렇게 되어 지지 않는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탓한다.
모든 일이 그렇게 되려면,
모든 인(因)과 연(緣)이 모여야 가능하다.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인과 연의 굵은 주체가 있어서,
그 굵은 주체끼리 모인 인연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두 줄기의 큰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방거사가 약산유엄선사와 밤늦게 법담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문밖을 나오니,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방거사는 찬탄하면서 말했다.
“아~! 정말로 모든 눈이 앉을 자리에 내려앉는구나!”
그러자 약산선사가 방거사를 배웅하라고 딸려 보낸 선객(禪客)이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눈이 어떻게 앉을 자리에 내려앉습니까?”
그러자 방거사는 그 선객의 뺨을 때리면서 말했다.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선(禪)을 해?”
일체 법이 인연이 없으면 생길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 눈이 내릴 때에 온도, 습도, 또 눈의 무게와 눈이 내려오는 동안 순간순간의 높이에 따라 그때그때의 바람의 세기와 그 자리의 온도 등이 단 하나도 달라지면 방거사가 말한 그 자리에 내려앉지 못한다.
그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상황과 사물과 사건들이 티끌만큼이라도 인연의 조건이 다르면,
우리 앞에 그렇게 펼쳐지지 못하고,
나 또한 그 것을 그렇게 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일체의 법은 모두 있어야할 인연이 반드시 있었기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바라고 분별하는 그런 것들과 전혀 다르고
사라졌으면 좋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것들이, 그 일체 법들이 우리의 바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요, 매순간 참된 진실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아니 우주 만물의 생주괴멸의 변화의 이치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사랑하는 너와 내가 있는데
왜 우리의 사랑이 천년만년 가지 않을까?
인연의 가장 굵은 주체인 너와 내가 있는데?
인연의 조건이 너와 나만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조건들이 너와 내가 만날 때에 함께 모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과 미련한 생각은 그 미세한 조건들은 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분별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굵은 조건만 바라보니, 눈에 보이는 것만 고치면 될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바깥을 보고 바라고,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고통과 번뇌 속에 몸부림을 친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미련한 생각은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주는 평등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굵게 주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보다도 더 가늘게, 아니 짐작도 못하는 아주 세밀한 인연의 조건들은 모를뿐더러 신경도 쓰지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에서 볼 때에는,
모든 것은 평등하여서 일어나는 조건에는 그 조건이 개입하는 만큼의 무게로 그 사건에 개입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웃는 ‘각주구검’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의 그 검객처럼,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어리석게 뱃전에 금을 긋고 사는 것이다.
그리곤 그 곳에서 칼이 나오지 않는다고 북북 거리며 화를 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저도 사람, 나도 사람, 똑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에이..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더니...”
등등의 말을 하며,
자신을 나무라고 쥐어뜯고 남을 탓하고 경멸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산다.
심지어는 살인을 하고 전쟁까지 일으킨다.
똑 같은 사람....?
우리는 언제 똑 같을까?
아니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거의 나와 똑 같은 적이 단 한번이라고 있었을까?
똑 같았다고 하더라도 나를 둘러싼 조건이 똑 같았던 적이 있었을까?
모든 시비는,
각주구검에서 생긴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화를 보지 못하는 무지한 각주구검이 바로 시비의 잣대인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똑 같았던 적이 없었고, 없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자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