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도 뒤도 돌아보지말고
며칠 전에 어떤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분은 평소에도 늘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공부하는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전 학위 논문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였다. 그때부터 그분은 학교 현장에 근무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래 뒤에 나는 어느 학회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거기서 그분을 직접 만났다. 당시 기억에 발표자의 명백한 오류에 대한 나의 지적에 그분이 전적인 동의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보고 선에 대한 견해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나에게 어느 큰 스님을 뵙도록 해달라고 하여 함께 가서 뵙고 말씀도 들었다. 여기까지는 우리 불교인의 자연스런 일상라고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 며칠 전의 전화에서 지금까지의 나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말을 들었다. 수맥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누구나 아는 도인들의 수준을 잰다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마 재미로 그러는가보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다시 전화가 왔다. 밀린 일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고 있는 연구실로 전화가 온 것이다. 며칠 전의 전화 내용은 믿거나 말거나 재미로 보는 운세 정도로 가볍게 지나쳤는데 이번 전화는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역대 조사들의 생몰 연대가 나오는 책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수맥 측정법으로 불조의 수준을 달아 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런 일 그만 두시고 공부하시죠.” 이런 나의 요구에 지체 없이 나온 대답은 “나도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재미있지 않습니까?”였다. 그러면서 그분이 모신다는 스님, 근세의 모든 선지식, 위로는 역대 조사스님까지 측정하여 얻은 도의 경지를 수치로 불러주었다. 수맥 측정의 방법으로 부처와 달마를 재고 사람을 재 본다는 것이 참으로 황당하였다. 그 자체가 소설에 나옴직한 황당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설령 맞다고 한들 남의 살림을 헤아리는 사람이 본인 살림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랴? 그 스스로 ‘공부는 공부대로 한다.’고 하였지만 그런 일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미 진정한 공부인은 아니다. 공부는 진실해야 한다는 어느 큰스님의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척, 공부가 다 된 척, 모든 것을 달관한 척 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하여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공부 잘한다는 칭찬, 도인이라는 존경을 받는다고 해 봐야 내면이 바뀌지 않은 것을 어찌하랴? 이것은 모든 선지식들이 지적하신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방해되는 것의 근본은 공부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순수해야 한다고 했다. 철저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 사바세계의 중생을 건지는 일이 공부인의 본분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정진해야 한다고 본다. 무엇인가를 얻거나 알려고 할 때 공부는 반드시 옆길로 빠진다. 나는 신통을 얻겠다, 원하는 세속의 목적을 달성하겠다, 남보다 뭔가 훌륭하게 되겠다는 등이 모두 밖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 자체가 아닌 밖으로 다른 뭔가를 추구하는 것은 불순한 것이다. 불순한 의도로 공부를 하면 도달하려는 목표가 자체가 잘 못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 길을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틀린 길은 가면 갈수록 점점 진실과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선요』의 저자이신 고봉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공부가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 두 끼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잠시도 앉을 수 없어 항상 왔다갔다 했을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았다. 그 속에서도 당신은 공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고봉스님은 피나는 정진이 과정을 배를 젓는데 비유했다. 강을 거슬러 한 삿대를 저으면 열 삿대가 떠내려가고 열 삿대를 저으면 다시 백 삿대가 떠내려가서 마침내 바다에까지 떠내려가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뱃머리를 돌려 강 위를 향하여 삿대를 젓는 것처럼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이지만 오로지 공부 밖의 일에 끌려가지 않고 순수하게 밀고 나가는 그 정신은 마침내 기적을 일으킨다. 고봉스님은 떠내려 온 바다에서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삿대질을 하는 ‘그런 지조와 지략을 가졌다면 이것이 곧 집에 이른 소식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재미없고, 얻는 것도 없고, 진전도 없는 공부가 재미있고 얻을 것이 있고, 발전하는 공부보다 더 나은 이유다. 공부는 순수한 마음으로 할 일이다. |
선 수행의 전제
얼마 전 조계종에서는 선수행의 지침서인 『간화선』(전국선원 수좌회 편찬위원회, 조계종 출판사, 2005.5.3)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일반인들이 선을 어렵게 보고 멀리하거나, 비파사나를 비롯한 다양한 수행방법이 외부로부터 국내에 소개되면서 조계종에서는 전통 조사선의 입장을 정립하고 교계 내․외에 알릴 필요를 절감했던 것 같다. 이 책은 한국에 전해지고 있는 전통 선인 조사선의 전체 입장과 방법을 포괄하여 체계화함으로써 그 우수성과 중요성을 부각하고 현대인들이 누구나 선 수행에 나설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이 번 부터는 이 책의 내용을 차례대로 살펴서 수행을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소개드리고자 한다.선은 본래 문자를 떠나 있는 것인데 선을 소개하는 책을 낸다는 것은 자기모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선의 실제 수행에 임하기까지도 수행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열의 관점에서 선이 높고 교는 낮기 때문에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간다거나, 교학의 공부 자체를 폄하하여 경시하는 뜻으로 이 말이 이해되는 듯하다. 실제 수행을 하기 위하여 선 수행의 방법을 이론적으로 익히는 것조차 그런 차원에서 무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선이 무엇이며 선 수행을 왜 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전혀 준비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릇된 지도를 받거나 자기 생각대로만 공부를 해 가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열에 다섯 쌍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릇되게 공부를 하는 것은 처음부터 공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눈 밝은 스승을 만나 공부를 바로 시작하면 되지만, 그릇된 공부에 빠진 사람은 길을 이미 멀리 벗어나서 바른 길로 되돌아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간화선』이라는 책은 흩어진 구슬을 실로 꿰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책은 크게 ‘제1부 기초단계, 제2부 실참단계(공부단계), 제3부 깨달음의 세계’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초단계부터 중요한 사안 별로 하나씩 살펴나가고자 한다. 먼저 조사선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 첫머리에는 조사선의 의미를 밝힌다고 하고 다음과 같은 예문을 제시했다.
죽이는 칼(殺人刀)과 살리는 칼(活人劍), 이것은 존재의 본래 모습이자 살아 흐르는 삶의 알맹이이다. 그러니 죽임에 대해 말하더라도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삶에 대해 말하더라도 곧 목숨을 잃고 만다. 깨달음 그 자리는 어떤 성인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니 억지로 깨닫고자 하는 이는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와 같다.(殺人刀活人劍 乃上古之風規 亦今時之樞要 若論殺也 不傷一毫 若論活也 喪身失命 所以道向上一路 千聖不傳 學者勞形如猿捉影 碧巖錄第12則 洞山麻三斤)
죽이는 칼과 살리는 칼을 옛날의 풍규(風規)이고 지금의 추요(樞要)라고 하였다. 즉 두 가지의 칼이 고금을 관통하는 진리라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두 가지 칼이란 어떤 것일까? 죽인다고 해도 털 하나를 다치지 않고 살린다고 하여도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하여 두 칼의 특성을 매우 역설적으로 설명했다. 죽이면 죽어야 하고 살리면 사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인데 무슨 칼이기에 죽였는데 살아나고 살렸는데 바로 목숨을 잃는 것일까?
칼이라는 말을 떼버리고 그냥 살활(殺活)이라고도 한다. 바로 살활이 고금을 관통하는 진리라는 말이다. 위의 해석에 따르면 살활은 바로 ‘존재의 본래 모습’, ‘살아 흐르는 삶의 알맹이’이다. 살활이 바로 진리라는 말인데 그 진리를 우리는 부처라고 한다. 일체 존재가 살활로 되어 있다는 말은 일체가 진리고 부처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일체 존재(A)가 살활(B)이고 그 살활은 진리(C)이고 진리는 부처(D)라는 말이다. 이 말을 기호화하면 ‘일체 존재(A)=살활(B)=진리(C)=부처(D)’라는 말이 된다. 처음과 끝 항목만 연결하면 일체 존재(A)가 바로 부처(D)라는 말이 된다. 조사선은 일체가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철저히 입각해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부처님 말씀과도 일치한다. 살활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雜阿含卷15).’라고 하신 이것과 저것의 관계 곧 연기 법칙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체가 본래 부처라는 입장이 원시 불교의 출발점이면서 조사선의 전제다. 원시불교와 조사선에서는 물론 오늘날 과학에서조차 일체가 연기(관계, 조건)로 되어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다음에는 이러한 조사선의 초기 역사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동봉 전재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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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秋江 全壽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8.01 '고우'스님 카페에 올려놓은 (전재강 교수)글을 가져와 올렸습니다. 빠른시일내로 울카페에 직접올리시길...
전재강님은 안동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회원얼굴'참조~! '대구구도회' 舊회원(기초과정 7기?) 입니다. ^^* -
작성자덕암 박종린 작성시간 12.08.02 동봉당! 좋은 글 감사하오이다. 공부인의 자세는 바로 이러해야지. 삿된 길을 가면서도 가는 줄을 모른다면 이미 공부인이 아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니 말일세. 좋은 경책의 말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