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라 이름하는 것(“바른 지혜”)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앎이다.
자연이란 “나”를 포함한 우주만물만상(“세상”)으로 드러나는 물질과 정신의 작용이다.
“나를 포함한 세상”이란 물질과 정신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작용이란 물질과 정신의 일어남과 사라짐인데 인연(因緣)이라 이름한다.
이치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리인데 연기(緣起)라 이름한다.
자연의 이치란 “나를 포함한 세상”의 작용 이치인 “인연의 연기”다.
“인연의 연기”의 드러남이 “나를 포함한 세상”의 일상 모습이다.
“나를 포함한 세상”의 일상 모습을 “삶”이라 이름한다.
인간이라 이름하는 현상의 관점에서 보는 자연의 이치를 4성제라 이름한다.
그래서 인간(“나”)라 이름하는 현상의 관점에서 보는 “바른 지혜”는 4성제를 아는 것이다.
“세상”이라 이름하는 현상의 관점에서 보는 자연의 이치도 다르지 않다.
4성제라는 자연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게 되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 괴로움이 생기고,
괴로우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게 되는데,
바르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이치도 깨닫게 되고,
괴로움의 원인과 자연의 이치를 알면 괴로울 원인행위를 하지 않게 되고,
괴로울 원인행위를 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게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해탈하고 열반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러한 괴로움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이치를 12연기라 이름한다.)
바르지 않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점점 더 괴롭게 되고,
괴로움에 빠져 괴로움의 원인도 자연의 이치도 알 수 없게 되고,
자연의 이치를 모르니까 계속하여 괴로울 원인행위를 하게 되고,
괴로움의 끝없는 악순환을 거듭하여,
죽어도 괴로움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끝없는 괴로움의 악순환 이치를 또한 12연기라 이름한다.)
괴로움으로 치닫는 자연의 이치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자연의 이치로,
자연의 이치가 바뀌는 자연의 이치를 8정도라 이름하고,
그러한 8정도를 “바르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이라 이름하고,
그래서 8정도에는 모두 “바른(正)”이 붙게 되며,
그래서 “바른”에 대한 바른 견해를 “바른 견해(正見)”라 이름하는데,
“바른”에 대한 “바른 견해”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야 가질 수 있고,
자연의 이치를 아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는데,
“바른 지혜”가 없으면 “바른”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으며,
“바른”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없으면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고,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면 “바른 지혜”가 드러날 수 없는데,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한 모순은 이렇게 풀리게 된다.
교학(이론)으로서의 4성제나 8(10)정도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설명(법문,가르침)일 뿐이고,
말과 글(관념)으로 설명하자니 관념의 한계(불완전성)으로 인하여 혼란이 생기고,
그러한 혼란으로 그러한 모순이 초래된 것으로,
그러한 모순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4성제는 바로 “삶” 그 자체다.
“나를 포함한 세상”이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이고,
“나를 포함한 세상”의 일상 모습을 “삶”이라 하는 것인데,
“삶”은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인 것이다.
괴로움으로 찌든 삶도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이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도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이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삶도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이다.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가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이다.
깨닫기 전의 삶도 깨달은 후의 삶도 모두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일 뿐이다.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인 “나”가,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인 “세상”에서,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인 “삶”을 살면서,
이미 자연의 이치의 드러남인 “나”(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과 행위를 보면서,
이미 온통 드러나 있는 자연의 이치를 왜 알(깨닫)지 못하는가?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미 온통 드러나 있는 자연의 이치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단지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단지 마음이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바르니 나쁘니 하는 분별만 하지 않으면,
단지 마음이 대상(알아지는 것과 아는 마음)에 넋을 빼앗기지만 않으면,
단지 마음이 온전히 깨어있기만 하면,
이미 온통 드러나 있는 자연의 이치는 그냥 알(깨달)아진다.
“바른 지혜”는 그냥 드러난다.
(“온전한 깨어있음”을 바른 삼매라 이름하고,
“온전한 깨어있음인 바른 삼매까지” 되(어가)는 자연의 이치를 8정도라 이름하고,
“바른 삼매를 통한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까지”의 자연의 이치를 10정도라 이름한다.)
그러함이 또한 자연의 이치다.
그렇다면 말해 보라.
4성제도 자연의 이치고,
8정도(수행)도 자연의 이치고,
자연의 이치는 스스로 일어나고 드러나고 사라지는데,
수행도 스스로 되어지는 것인데,
수행한다 함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른 견해”와 “바른 지혜”란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되는가?
그리고 자연의 이치(법,진리)란 무엇인가?
“말해 보라” 하니까,
또 말과 글(법문이나 가르침)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부리지 마라.
부처님은 부처님의 말과 글도 그냥 믿지 말라 하셨다.
법문이나 가르침은 “바른 견해”나 “바른 지혜”가 아닌,
그냥 하나의 견해고 지혜일 뿐이다.
수행으로 드러나는 자연의 이치를 스스로 확인(통찰)한 견해나 앎(깨달음)이,
“바른 견해”고 “바른 지혜”다.
법문이나 가르침은 인연이고 연기하게 하는 조건일 뿐이니,
법문이나 가르침을 듣거나 보면 스스로 작용하게 되고,
그냥 견해고 지혜든 “바른 견해”고 “바른 지혜”든 스스로 작용하게 되니,
법문이나 가르침을 맹신도 하지 말고,
법문이나 가르침을 무시도 하지 말고,
법문이나 가르침을 분별(차별)도 하지 말고,
수행은 하는 것이라고 착각도 하지 말고,
“나”가 수행한다고 착각도 하지 말고,
수행하는 “나”가 있다고 착각도 하지 말고,
단지 깨어 있으라!!!!!!!!!!!
단지 깨어 있으면 스스로 분명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