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인생)이 마음에 드는가?
삶에 만족하는가?
“나”에게 불만은 없는가?
삶이 괴롭지 않는가?
삶이 살만한가?
그런게 인생이라고 체념하면,
욕심이나 화에 정신줄 놓고 휩쓸려 살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스스로 부정하면,
부처나 신에게 온통 삶을 맡기고만 있으면,
결코 괴로움(불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항생제나 진통제로 통증을 적당히 다스리며 사는 것과 같다.
물론 그러함도 자연의 이치다.
괴로움(불만)이 악순환되는 자연의 이치다.
(부처님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12연기로 설명하셨다)
그러한 자연의 이치대로 살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살아라.
아직도 살만하면 그렇게 살아라.
아직도 덜 괴로우면 그렇게 살아라.
그러함도 삶일 뿐이다.
그러한 삶이 싫으면,
그러한 삶에 넌더리가 난다면,
그렇게는 못살겠으면,
그러는 자신이 싫으면,
어영부영하는 자신이 못마땅하다면,
못나 보이는 자신이 미우면,
그러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제대로 내어 보라.
(이러한 마음을 발심이라 한다)
어차피 뻔한 삶인데,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바뀔 것이 별로 없는 삶인데,
지금까지 희망이라는 헛된 꿈에 질릴만큼 속아왔는데,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일 뿐임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데,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젊음은 가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무슨 한심한 미련이란 말인가?
백척장대에서 목숨걸고 한걸음 내딛듯이,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로,
더 이상 이렇게 살바엔 죽는게 낳다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던,
모든 견해 관념 가치관 신념 믿음을 과감히 버리고,
어떠한 상황 처지 상태에 직면하더라도,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분별하지도 말고,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에 깨어있기만 해 보라.
그렇게 해 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해 보라.
(이러함을 결심바라밀이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알게 된다.
그러면 예외없이 누구나 된다.
그러면 반드시 삶(인생)이 바뀐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이 바뀐다.
그러함도 자연의 이치다.
괴로움(불만)이 없어지는 자연의 이치다.
(부처님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또한 12연기로 설명하셨다)
아무도 삶(인생)을 바꿔줄 수 없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신도 삶을 바꿔주지 않는다.
부처님과 하느님과 신은 자연의 이치를 바꾸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대로 작용한다.
자연의 이치는 깨어있음으로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흐른다.
그러함이 자연의 이치다.
괴로움이 악순환되는 자연의 이치로 살 것인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선순환의 자연의 이치로 살 것인지는,
스스로의 삶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이냐 정신빠진 삶이냐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