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하는 짓에 관심을 두는 상태를 이름하여 수행이라 한다.
자신이 하는 짓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고,
몸과 마음의 현상들은,
느낌이고 생각이고 의도고 말이고 행동이고 그것들을 아는 앎이다.
자신의 하는 짓에 관심을 두는 것(상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아는 것(상태)고,
몸과 마음의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말과 행동과 앎을 아는 것(상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아는 상태를 이름하여 깨어있음이라 한다.
그래서 수행은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말과 행동과 앎을 아는 상태(깨어있음)이다.
몸과 마음의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말과 행동과 앎은 저절로 일어난다.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고,
느낌이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은 일어나고,
생각이 있으면 의도하지 않으려 해도 의도는 일어나고,
의도가 있으면 말하려 하지 않아도 무심코 말해지고,
의도가 있으면 행동하려 하지 않아도 무심코 행동해지고,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말과 행동이 있으면 알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알아지고,
그러한 알아짐(앎)이 있으면 알려하지 않아도 그 앎이 또 그냥 알아진다.
그래서 그러함을 아는 상태인 깨어있음(수행)은 그냥 된다.
그냥 되는 수행(깨어있음)이 왜 잘 안된다고 하는가?
그냥 되는 수행을 왜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니까 그냥 가만 있으면 그냥 잘 될텐데,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을 자꾸만 방해하니까 그냥 저절로 됨을 모르고,
그냥 저절로 됨을 모르니까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행(깨어있음)을 스스로 방해하고 있는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을 (있지도 않은) “나”가 한다고 착각하여,
자꾸만 수행을 하려 함으로써 (마음이 헷갈리게 하여) 방해하고,
자꾸만 수행이 이러니저러니 잘되니안되니 분별(생각)함으로써 방해하고,
그러한 착각과 분별에 더하여 잘하려는 욕심까지 부림으로써 더욱 방해하고,
그러한 착각과 분별과 욕심에 더하여 잘 안된다고 화까지 냄으로써 더욱 방해하는 것이다.
단지 그러한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만 없으면 수행(깨어있음)은 그냥 되는 것이다.
그러한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가 없다는 것은,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가 안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일어난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를 없애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러한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에 휩쓸려 정신줄(넋)을 놓지 않고,
그러한 착각과 분별과 욕심과 화까지도 알아지는 대로 아는 것(상태)다.
그냥 가만 있으면 그냥 알아진다.
그냥 알아지는 상태가 깨어있음(수행)이다.
수행을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수행이 어렵다.
수행을 어렵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남을 아는 것도 깨어있음(수행)이다.
수행이 어렵다는 생각이 일어남을 아니까 수행을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깨어있음(수행) 아닌가?
그러니 수행(깨어있음)은 쉽고도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