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음은 중도다.
중도란 팔정도다.
팔정도는 수행이다.
수행으로서의 팔정도는 깨어있음이다.
중도란 깨어있음이다.
중도란 욕심과 화라는 현상에 깨어있음이다.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욕심부리)지 않고,
감각적 욕망을 거부하(화내)지 않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심부림과 화냄에 깨어있음이다.
중도란 분별(관념작용)이라는 현상에 깨어있음이다.
부처(완전)-중생(불완전)이라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삶(있음)-죽음(없음)이라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옳음(정)-그름(사)라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좋음(호)-싫음(오)라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바름(선)-나쁨(악)이라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그러한 분별 현상에 깨어있음이다.
중도란 몸과 마음의 현상에 깨어있음이다.
몸과 마음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라(존재한다)고 착각(분별,동일시)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나”의 죽음(존재의 소멸)이라고 착각(단정,짐작)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깨어있음이다.
중도란 작용을 아는 작용의 상태다.
중도란 몸과 마음의 현상에 깨어있음이고,
몸과 마음의 현상은 몸과 마음의 물질적 정신적 작용의 드러남이고,
깨어있음은 앎(이라는 작용)의 드러남이니,
중도란 몸과 마음의 물질적 정신적 작용을 아는 작용(앎)의 상태다.
몸과 마음의 물질적 정신적 작용을 아는 작용은,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자연의 이치)로 되어지고,
알려 하지 않아도 저절(자연의 이치)로 알아지는,
자연의 이치대로 작용되고 알아질(작용될) 뿐이다.
그래서 중도란 자연의 이치대로 작용되는 상태(연기)고,
그래서 중도란 작용을 하고 아는 주(실)체가 없는 상태(무아)다.
중도란 깨어있음으로 욕심이나 화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란 깨어있음으로 분별의 충돌(대립)에 빠지지 않고,
중도란 깨어있음으로 존재(“나”)의 유무를 착각하지 않는 상태다.
그래서 중도란 양극단 대립 유무가 없(해소되)는 상태(불이)다.
그래서 중도란 혼란과 동요가 없는 고요한 상태(삼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