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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행 게시판

한바탕 문답놀음

작성자우보|작성시간13.07.14|조회수22 목록 댓글 0

<생각과 의도와 말과 행동은 그렇게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연기緣起).

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우보거사-

 

그렇다면 착각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 아닌가요?

 

착각하는 "존재"란 없습니다. 그저 "착각"이라는 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란 없습니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주체가 없이 작용만이 있다고요?

형상을 가지고 있는 물질적 ''라는 것이 없다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형상이 없으며 감각되지 않는 내면적 ''는 존재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주체가 있다고요? 그것이 "'라고요?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생각을 ""가 한다고요? 느끼려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느낌을 ""가 느낀다고요? 생각은 생각(작용)이고 느낌은 느낌(작용)일 뿐입니다.

 

적어도 작용이 있거나, 작용하고 있다고 아는 존재마저 부정할 수는 없죠.

데카르트가 말한 명제마저도 부정하시는 겁니까? 적어도 우보거사님의 생각마저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생각이 곧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작용은 있지요. 생각하는 작용을 ""라고 생각하니 ""는 생각일 뿐이지요. 그런데 생각작용은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뿐,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그 생각작용을 굳이 ""라고 해야 할까요?

아는 존재는 없고 앎(작용)만 있고, 생각은 생각(작용)일 뿐이지요. 생각이 존재라는 것도 생각(관념)일 뿐입니다. 데카르트의 명제도 관념일 뿐입니다.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생각(작용의 현상)으로 알 뿐입니다.

 

생각이 작용이라 해도 생각하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나요?

'생각하는 작용' 그게 바로 ''입니다.

지금 이렇게 트윗으로 대화하는 그 생각하는 작용, 그게 바로 저이고 우보거사님입니다.

생각도, '생각하는 작용'無常하지만 영원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작용'이라는 면에서는 저나 님이 같지만 생각은 저마다 다르므로 ''''이다 하는 거지요.

이름을 뭐라 붙이든 생각하는 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요.

 

"...無常하지만 영원"하니, "...같지만 ...다르다", "...존재한다"니 하는 관념(생각)에 얽매이지 마시고, 생각(작용)의 실상()를 바로 아십시요. 그러면 00거사님 말씀처럼 뭐라고 표현한들 어떻습니까!!!

 

그리고 고정되지 않는 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고 계신데,

계속 변하고 고정된 형상이 없어도 생각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생각이 바로 존재입니다. 부디 허무주의에 빠지지 마시길요^^^ 

또한 우리의 몸도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며, 물질 우주도 고정된 궤도를 도는 게 아니라 계속 확장하고 있다고 하죠.

이처럼 이 세상에는 형이상학적이든 물질적이든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즉 모든 게 무상해도 저마다 존재하고 있죠.

 

"존재"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계속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작용"을 의미합니까?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는 "생각작용""존재"라고 이름붙여야 할까요?

"존재"가 무엇입니까? 결국 ""라는 관념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관념인 ""를 인정하지 않아도 삶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라는 관념 때문에 오히려 삶이 괴롭게 되지요. ""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냥 편안하지요.

 

""라는 관념 때문에 삶이 괴롭게 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밖으로는 무아이지만 안으로는 저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임에서 찾았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이것""(나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단지 "생각"이라 불리는 작용일 뿐임을 아는데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상에는 안밖이 따로 없으며, "무아"임이(이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이겠지요.

 

모든 것이 무상하지만, 모든 것이 연기하지만,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나는 우리에게 감각되는 바와는 달리 고정된 형상이 없으므로 무아인 반면, 내면적이고 영적인 나는 형상도 없고 감각되지도 않으나 무상하면서도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나(작용)"이나 "내면적이고 영적인 나(작용)"이나 "작용이라는 실상()"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질과 정신이 다르다는 분별은 사실이 아니라 관념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강물이 계속 흘러가도 강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은 계속 바뀌어도 생각 작용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생각이 단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생각 작용은 영원하답니다.

 

"강의 실상"은 단 한순간도 같은 물일 때가 없는 매순간 새로운 물이지요. 그래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강"은 관념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은 여전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은 계속하여 물길도 모양도 바뀌고(:4대강사업) 심지어 없어지기도 하지요. "생각"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니다. "생각작용"은 그냥 작용이지 "존재"라고 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존재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영원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원불변한 것을 찾습니다만 그것은 허상이고 님의 말씀처럼 관념에 불과하죠.

그러나 우리의 생각 또는 생각 작용은 영원히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불변하는 것(존재)"는 없지요. "생각 또는 생각작용"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생각 또는 생각작용은 영원히 변하는 <존재>"라면 특정할 수 없고 "","",""으로 구분되지 않는데, 굳이 <존재>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냥 "생각(작용)은 생각(작용)일 뿐"이라고 하면 안됩니까?

 

변한다고 특정할 수 없는 건 아니지요.

마치 강과 바다처럼 지금은 강이므로 서로 다르지만 나중에는 바다에 모이면 하나가 되는 거지요.

즉 저마다 생각이 강물처럼 흐르는 강에 우리를 비유할 수 있겠네요.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한 생각(작용)도 독립하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생각들은 서로서로 연관되어 따로 떼어서는 있을(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될 수 없지요. 바다와 강이 다르다는 것도 다 관념일 뿐입니다.

 

물론 저도, 나와 남으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니까요.

그러나 외면적 모습이든 내면적 생각이든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같은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라 할지라도 저마다 다른 것처럼요.

 

모습이나 생각이나 사과들은 다 관념이지요. 그것들의 관념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실상은 모두 작용으로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서로 연기(緣起)하는 작용들일 뿐입니다.

 

또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생각이든 작용이든 그것을 인식 내지 인지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억지스럽군요.

그것마저 작용이라 해도 작용이 곧 나라는 존재인 거지요.

 

데카르트가 옳다고 어떻게 확신하나요? 데카르트 또한 실상은 모르고 관념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다시한번 지금까지의 대화를 되새겨 보십시요. 작용은 작용일 뿐이지 ""라고 이름붙이는 불필요한 관념놀이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라는 관념을 인정하는 순간, ""라는 관념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괴로움을 일으키면서까지 관념 놀음을 하셔야 겠습니까? 과감히 관념 놀음에서 벗어나십시요. 그러면 그냥 편안해집니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생각이 흐르는 생각의 원천입니다. 변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입니까? 생각은 매순간 다르니 "영원히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지요. 매순간 새로운 작용입니까? 매순간 새로운 작용을 "영원히 존재"한다고 표현할 수 있나요?

 

생각이 계속 흐른다 해도 생각의 근원인 생각하는 작용은 특정되지 않나요?

마치 샘물이 계속 흘러나와도그 근원으로서의 샘이 존재하는 것처럼요.

또는 자동차가 계속 지나다녀도 도로는 존재하는 것처럼요.

 

매순간 새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작용을 어떻게 특정하나요? ""이니 "도로"니 하는 것의 실체가 있나요? 물 빼면 ""은 무엇인가요? 자갈, 콜타르,모래 등을 빼면 "도로"는 무엇인가요?

 

생각이 원천도 없이 저 혼자 떠돌아 다닐까요?

아무리 생각이라 해도 그 생각이 나온 근원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 근원으로서 내가 존재함을 저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생각은 느낌으로 일어나고, 느낌은 보이고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맛 보여지고 감촉이 느껴져 일어나고,............. 그러한 작용의 연기만 있지요. 생각의 "근원"이라는 것도 관념에 불과합니다.

"생각의 근원"이 관념이니, 그것을 ""라는 것은 더더욱 관념에 불과합니다. 관념을 존재한다고 표현할 수 있나요?

 

나와 남이라는 구분에서 벗어나면 편안해진다는 말씀, 저도 체험한 바입니다.

그러나 생각에서만 나와 남이 없을 뿐 생활에서조차 나와 남의 구분이 없을 수는 없죠.

만일 그렇다면 서로 대화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관념은 서로 대화(교통)할 때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관념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관념을 관념으로 아시고, 관념을 실체(존재)시 하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관념을 실체시 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관념을 저는 주관으로 이해합니다.

관념이라는 게 저 혼자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라는 주체의 관념일 뿐이죠.

즉 내가 없으면 관념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나라는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관념이 존재하나요?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도 관념입니다. 관념으로 부터 대화를 전개하시면 끝없는 관념 놀음일 뿐입니다. 관념이 아닌 실상에 기반하여 대화를 하셔야 공감하게 됩니다. 관념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실상()는 다를 수가 없으니까요.

작용을 실체시 하는 인식의 착각(전도몽상)으로 ""라는 관념이 일어나고, ""라는 착각이 "나가 한다"는 착각을 또 일어나게 할 뿐, ""라는 실체(주체)는 없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관념이 존재하나요? 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더 드리며,

실상()는 다를 수가 없다는 님의 말씀 중에서 실상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여쭙고 싶군요.

 

""라는 주체는 없지만, 인식작용에 의하여 관념이 생겨납니다. 실상은 이름(관념)붙기 전의 연기작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인식작용 자체와 연기작용 자체는 존재하겠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작용이란 있어서 있(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해서 있는(작용인) 것입니다.

 

있어서 있거나 작용해서 있거나 간에 있는 건 있는 거지요.

석가 세존의 유언에서도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했거늘...

거사님은 자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하시는군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상()를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라는 존재(관념)이 아닌 실상()를 가르키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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