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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교수님

0614 가까이 가는 사랑

작성자권시혁|작성시간26.06.12|조회수17 목록 댓글 0

0614 가까이 가는 사랑. 10:25~37. 324, 340,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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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rnjstlgur/9oZ8/280 권시혁

 

예배로 부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4:2b)

 

마음 문을 열고

 

율법 교사가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배우려는 사람처럼 서 있었으나, 사실은 시험하려는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입술에는 경건의 언어가 있었지만, 마음 깊은 자리에는 자기 의를 지키려는 차가운 칼끝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질문보다 질문하는 사람의 심장을 먼저 보십니다.

 

어떤 이는 몰라서 묻고, 어떤 이는 알지만 순종하기 싫어서 묻습니다. 어떤 이는 길을 찾기 위해 묻고, 어떤 이는 자기 길이 옳다는 것을 증명받기 위해 묻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질문은 언제나 그 사람의 영혼을 드러냅니다.

 

말씀 앞에 서면 입이 아니라 존재가 벌거벗겨집니다. 예수님 앞에 섰던 그 율법 교사처럼, 우리도 종종 신앙의 질문을 하지만 사실은 회개의 문 앞이 아니라 자기 정당화의 벽 앞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1. 말씀으로 가면의 벗기시는 주님

 

주님은 그에게 곧장 정답을 주시지 않고, 되묻는 방식으로 그의 가면을 벗기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놀랍습니다. 주님은 늘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가십니다. 신앙은 자기감정의 물결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사람의 생각은 흔들리나, 기록된 말씀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율법교사는 대답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대답은 정확했습니다.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위험했습니다. 머리로 아는 진리는 때때로 심장을 더 완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하나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외울 수는 있어도 진리 앞에 무너질 수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강론할 수는 있어도 말씀에 찔려 울 수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언어를 구사할 수는 있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면서도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는 것, 율법을 읽으면서도 율법이 겨누는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것,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것은 영혼의 깊은 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말씀은 율법 교사를 살리기 위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무너뜨리기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행하라는 말씀 앞에서 자기의 불가능을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의 요구를 끝까지 밀고 들어가면,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사다리가 아니라 거울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계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서 정직한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본 사람은 남을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깊이 안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대신, 자기 가슴을 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엎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매우 슬프고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그의 속마음을 폭로합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비극이 터져 나옵니다.

 

죄인은 죄를 감추기 위해 죄보다 더 종교적인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회개 대신 정당화를 택하고, 애통 대신 변명을 택하고, 십자가 대신 자기 의의 벽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은 사랑의 범위를 넓히려는 질문이 아니라, 사랑의 범위를 줄이려는 질문입니다. 누구까지 사랑하면 되는지, 누구는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지, 경계선을 긋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의 의무를 최소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품을 제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경계선을 넘어 흐릅니다. 사람은 담을 쌓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문을 여십니다. 사람은 선을 긋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상처 난 자를 향해 다가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의를 주지 않으시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왜냐하면? 딱딱한 정의는 사람을 숨게 만들지만, 살아 있는 이야기는 사람을 붙잡아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머리를 우회하여 양심의 심장에 꽂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실제로도 험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단지 지리적 길만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길이기도 합니다.

아담 이후의 인류는 모두 이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사망과 어둠의 길목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밖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찢겨 있고,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으며, 살아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거의 죽은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상처입니다. 죄는 단지 법을 어긴 행위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찢어놓은 재앙입니다. 관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이웃을 두려움과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조차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강도는 그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버려두었습니다.

 

2. 죄와 악은 언제나 사람의 존엄을 벗겨 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자는 단지 육체만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존엄도 피를 흘립니다.

 

옷이 벗겨졌다는 것은 수치가 드러났다는 것이고, 맞아 쓰러졌다는 것은 힘이 부서졌다는 것이며, 버려졌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 단어 안에 타락한 세상의 어둠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수치, 무력, 버려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세 단어 속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까. 누군가는 사람들 틈 속에서 외롭고, 누군가는 가족 안에서 버려졌고, 누군가는 실패 앞에서 수치를 삼키며, 누군가는 죄책감 속에서 스스로를 때리며 살아갑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어 레위인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성전과 가까운 사람들, 예배와 제도와 경건의 바깥 모양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처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장면입니까. 종교가 사람을 반드시 사랑으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 없는 종교는 사람을 더 차갑게 만들 수 있습니다. 거룩한 일을 한다는 자의식이 죄인을 향한 긍휼을 마르게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쩌면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위험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이미 늦었을 수도 있고, 부정함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미루는 이유는 언제나 그럴듯합니다. 사랑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논리를 발명합니다. 정죄는 즉시 하지만, 긍휼은 늘 나중으로 미룹니다. 도덕적 계산은 빠르지만, 자비의 걸음은 느립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냉기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이들을 봅니다.’ 문제는 보지 못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고도 지나가는 데 있습니다.

 

뉴스로 보고, 거리에서 보고, 교회 안에서 보고, 가정 안에서 보고, 자기 마음 안의 상처까지도 봅니다. 그러나 봄이 멈춤으로, 이어지지 않고, 멈춤이 돌봄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너무 계산적입니다. 너무 피곤합니다. 너무 자기 삶을 지키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피 흘림은 우리의 일정표에 끼어들 틈을 얻지 못합니다. 사랑은 늘 방해처럼 찾아오는데, 우리는 그 방해를 은혜의 방문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청중의 예상을 깨뜨리십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 청중에게 사마리아인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들은 멀리해야 할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여기에 복음의 폭발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멀다고 여긴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종교적 중심가가 지나간 자리에서, 멸시받던 주변부가 사랑의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우리의 편견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누가 거룩한 사람인지 쉽게 단정하지만, 하나님은 그 단정을 뒤집으십니다. 우리는 누가 가까운 사람인지 자기 기준으로 나누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배제한 자리에서 참된 이웃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판단을 따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자격 심사를 통과한 자에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서 넘쳐 나와 예기치 않은 통로로 흐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창자가 뒤틀릴 만큼 깊은 긍휼, 존재의 중심이 흔들리는 자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과부를 보시고, 병든 자를 보실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참된 사랑은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데서 솟아오릅니다. 머리끝에서가 아니라 창자 깊은 곳에서 흔들립니다.

 

그래서 긍휼은 감상과 다릅니다. 감상은 눈물을 흘리고 끝날 수 있지만, 긍휼은 발을 움직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손이 움직이고, 손이 움직이면 시간과 기름과 돈이 흘러갑니다.

 

3. 참된 자비는 언제나 자기 것을 쏟게 만듭니다.

 

그는 가까이 갔습니다. 이 한 문장이 참으로 찬란합니다. 사랑은 멀리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갑니다. 사랑은 해석으로 끝나지 않고 접근으로 나타납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곁으로, 냄새나는 현장으로, 번거로운 현실 속으로, 자기 시간이 깨지는 자리로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멀리서 구원의 원리만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땅의 먼지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 곁으로, 깨끗한 분이 부정한 자 곁으로, 영광의 주께서 수치의 골짜기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걸음은 결국 더 큰 사마리아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멀리서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는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었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상처를 만집니다. 피를 닦아 냅니다. 고통의 부위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기름은 부드럽게 하고, 포도주는 소독하고, 붕대는 덮어 줍니다. 여기에는 자비의 섬세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상처를 거칠게 다룹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말하지만, 상대의 부서진 상태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진실하면서도 부드럽고, 분명하면서도 치유적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찢어진 존재를 더 찢지 않으시고, 오히려 싸매어 주십니다. 우리의 말도, 우리의 목회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 교회도 이 주님의 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을 분석하는 데 능하기보다, 사람을 싸매는 데 익숙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닙니다. 자리를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 편안함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자를 자기 자리 위에 올려놓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대신 짊어지시고, 자기 자리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저주를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 의를 입히셨습니다. 그분은 버림받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아들의 자격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홀로 걸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대속적입니다. 참된 사랑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사랑,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사랑,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맡기며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한순간 감정의 불꽃으로 끝나지 않고 책임의 지속성으로 이어집니다. 지나가는 선행이 아니라 끝까지 감당하는 성실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잠깐 감동하고 금세 잊어버리는 얕은 선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랑은 끝까지 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시작만 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마침까지 가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회개한 자를 잠시 안아 주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붙드시는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단지 착하게 살라는 윤리 수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희가 얼마나 상처 입은 자였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값비싼 사랑으로 너희를 살렸는지 보라는 복음의 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단순히 도덕적 본보기로만 읽으면 영혼이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스스로에게 말하게 됩니다. “더 착해져야 한다. 더 친절해야 한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물론 적용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적용이 복음에서 나오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죄책감으로 시작한 친절은 피곤 속에서 끝나고, 자기 의로 시작한 봉사는 상처 속에서 독이 되며, 칭찬을 기대한 사랑은 외면당하면 곧 식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쓰러져 있던 자였고, 내가 피 흘리던 자였고, 내가 버려진 자였으며, 내가 살 수 없던 자였다는 사실을 볼 때, 그제야 참된 사랑이 시작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고, 안긴 사람만이 안아 줄 수 있으며, 살려진 사람만이 생명을 돌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가정 안에 강도 만난 자는 없습니까. 겉으로는 아무 말 없지만, 마음이 피투성이가 된 가족은 없습니까. 교회 안에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드리지만 아무도 자기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무너지는 성도는 없습니까.

 

사회 안에는 어떻습니까. 편견 때문에, 가난 때문에, 병 때문에, 실패 때문에, 노년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길가에 누운 사람들은 없습니까. 그리고 내 안에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내가 바로 상처 입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죄책감에 맞아 쓰러져 있고, 관계의 배신 때문에 피 흘리고 있고,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절망 때문에 거의 죽은 듯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먼저 당신을 향합니다. 주님은 당신 곁에 가까이 오십니다. 당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피 냄새 때문에 돌아서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더러움 때문에 손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손으로 당신을 싸매십니다. 당신이 말하지 못한 아픔까지 아시는 분이 당신에게 오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감동적인 실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느 겨울밤, 도시의 차가운 골목에서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빴고, 모두가 급했습니다. 지나가는 이들은 힐끗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누군가는 술 취한 사람일 거라 여겼고, 누군가는 괜히 얽히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배달 노동자가 오토바이를 멈추었습니다. 그도 넉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고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려와 자기 외투를 벗어 노인의 몸에 덮어 주고, 손이 얼어붙은 그 사람을 부축해 불빛 있는 가게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신고하고, 따뜻한 물을 구하고, 구급대가 올 때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그 노인이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군가 그 청년에게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길에 버려진 것 같은 날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저를 그냥 지나가지 않았거든요.”

 

얼마나 복음적인 말입니까. 살려진 사람만이 멈춥니다. 붙들린 사람만이 붙듭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랑의 크기만큼 남에게 흘려보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감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육신이 되어 움직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말씀이 설교단에서만 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서, 병실에서, 상담실에서, 골목에서, 가난한 자의 집에서, 외로운 노인의 방에서, 지쳐 있는 청년의 어깨 곁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늘 사마리아인처럼 서고 싶지만, 먼저 강도 만난 자로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가 크게 보입니다. 십자가는 도덕의 응원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교만이 꺾이고, 자기 의가 무너지고, 남을 재단하던 눈이 울기 시작합니다. 내 상처를 싸매신 주님의 손을 경험한 사람은 남의 상처 앞에서 무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막으로 옮겨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버려둘 수 없습니다.

 

내 빚을 누군가 대신 갚아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랑의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혹시 오늘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조용히 되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이냐.” 당신의 곁에 있는 지친 배우자에게, 속으로 울고 있는 자녀에게, 병든 부모에게, 소외된 성도에게, 외로운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에게, 실패로 주저앉은 청년에게, 그리고 어쩌면 미워했던 바로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오늘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사랑은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멈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까이 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름을 불러 주는 데서 시작됩니다. 손을 내미는 데서 시작됩니다.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 시간과 내 자리와 내 기름과 내 포도주를 내어 주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도 소망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냥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내일 또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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