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1가장 작은 자를 품으시는 주님. 눅9:46~48. 324, 340, 469.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1274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281 권시혁
예배로 부름: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4:2b)
☞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을 누구보다 오래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질문 하나가 조용히, 그러나 독버섯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누가 큰 자인가.” 이 말은 인간의 오래된 질문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중요하냐. 누가 더 인정받느냐. 누가 더 중심에 서느냐. 누가 더 박수받느냐. 누가 더 기억되느냐. 세상은 이 질문 앞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몸부림칩니다.
놀랍게도 이 질문은 세상 한복판에서만 아니라, 은혜의 자리에서도 고개를 듭니다. 교회 안에서도, 봉사의 현장에서도, 심지어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이름을 더 의식합니다.
1. 변론은 마음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성경은 제자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 변론은 입술의 소리이기 전에 마음의 소리였습니다. 이미 그들의 내면에는 서열의 사다리가 세워지고 있었고, 자기를 높이려는 은밀한 욕망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남보다 앞서고 싶어 하고, 더 많이 인정받고 싶어 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본성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손에 쥐고 싶었던 것도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높아짐의 욕망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속삭임도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이유도 백성의 노랫소리 속에서 자기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자기 자신을 향한 숭배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자기 왕좌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사람은 입으로 감출 수 있습니다. 표정으로도 숨길 수 있습니다. 거룩한 말투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겸손한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의 변론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 말을 하는지 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평가하지만, 예수님은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열망과 경쟁과 상처와 야망을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했던 말씀이 여기서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춰진 서열의식도, 은밀한 경쟁심도, 인정 중독도, 비교의식도 다 드러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정말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이용하여 자기를 높이려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빌려 자기 이름을 세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기를 원하고, 기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경건해 보이기를 바라며, 헌신하면서도 결국 내 자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의 상처도 많은 경우 여기서 생깁니다.
누가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중심인가. 왜 나는 알아주지 않는가. 왜 저 사람은 앞에 서는가. 왜 내 수고는 보이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시작되면 은혜의 공동체는 금세 경쟁의 장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은혜로 사는 자라는 사실이 희미해지면, 우리는 곧바로 자기 의와 자기 과시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방식조차 너무나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너희가 틀렸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2. 어린아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 한가운데 아주 작은 존재 하나를 세우십니다. 세상은 큰 자를 중앙에 세우지만, 예수님은 작은 자를 자기 곁에 세우십니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을 조명 아래 두지만, 예수님은 힘없고 말 없는 어린아이를 그 영광의 중심 가까이에 놓으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오늘 우리가 감상적으로 떠올리는 순수함의 상징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는 힘이 없고, 지위가 없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고,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존재였습니다. 계산의 대상이 아니고, 거래의 중심이 아니고,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곧 어린아이는 작음, 약함, 비 의존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의존과 무력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존재를 끌어안듯 곁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여기서 “영접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데코마이) 입니다. 단순히 문을 열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맞아들이고, 자기 공간 안으로 들이고, 관계의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합니다.
형식적인 인사나 피상적인 친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권력자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가장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기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자의 곁에 서셔서 “그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기독교는 겸손을 도덕적 자세만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를 낮아지신 그리스도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정말 낮아질 수 있는 이유는 억지로 자기를 작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이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증명하려고 소리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크기를 묻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가까움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큰가가 아니라 누가 주님의 마음 가까이에 있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작은 자, 약한 자, 밀려난 자, 이름 없는 자, 상처 입은 자를 향합니다. 세상은 사람이 쓸모 있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사랑의 대상인가를 먼저 보십니다.
세상은 영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시선으로 품습니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 곁에 몰려들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는 사람 곁에 멈추십니다. 세상은 빛나는 사람을 기억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작은 사람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를 향해 마음이 끌리는가.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만 다가가고, 쓸모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미소 짓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서도 혹시 이름 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고, 조용하고 약하고 표현이 서툰 사람은 스쳐 지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을 찢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못 박히신 자리에서 인간의 자랑은 침묵해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자주 사람의 박수에 목말라했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영광을 사랑했는지를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를 살립니다. 내가 큰 자가 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빛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잊혀져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서 나는 이미 이름 불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우리는 보통 큰 사람이 작은 척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열등감 속에 사는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위대함은 자기를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크게 보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던 그 영혼의 질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작은 사람을 편안하게 살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진짜 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축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진짜 큰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놓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정말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누가 앞에 섰느냐가 아니라, 가장 연약한 사람이 그 공동체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아이가 환영받고, 노인이 외롭지 않고, 새 신자가 주눅 들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이 숨지 않아도 되고,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 곳, 그곳이야말로 예수님이 계신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작은 자를 자기 곁에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도구처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이 “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곁은 영광의 자리입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입니다.
우리가 밀어낸 사람을 예수님은 가까이 두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람을 예수님은 보십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사람을 예수님은 품으십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 가운데 “나는 별 볼 일 없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다”고 우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늘 주변부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분이 계십니까?
3. 예수님은 여러분을 자기 곁에 세우시는 분입니다.
세상이 외면한 사람을 주님은 품으십니다. 당신이 사람들 눈에 작게 보여도 주님의 눈에는 작지 않습니다. 당신의 눈물은 주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조용한 충성은 하늘에서 크게 기억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생명책에는 기록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작은 자를 향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복음은 우리를 수직적으로 하나님께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이웃에게 낮아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면서 작은 자를 귀찮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내 가슴을 찢고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식탁에서 소외된 사람, 교회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 가족 안에서 늘 양보만 하던 사람, 병상에서 외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내 마음의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눈이 내 눈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한 노권사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앞에 나서지 않았고, 특별한 직분의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목소리도 작았고, 몸도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일마다 예배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와서 맨 뒤 구석 자리를 조용히 살폈습니다. 혹시 처음 온 사람이 있으면, 혹시 혼자 앉아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 말 없이 다가가 따뜻한 손으로 손을 잡아 주고 옆에 앉아 주었습니다.
어느 겨울에는 동네에서 버림받듯 지내던 아이 하나가 교회 마당을 서성였는데, 그 권사님은 그 아이에게 새 양말을 신겨 주고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먹이며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너를 여기로 보내셨구나.” 그 아이는 훗날 자라 목회자가 되었고, 자기 인생이 바뀐 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날 설교를 먼저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먼저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한 노인의 손에서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진실입니다.
작은 자를 영접하는 손길 속에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이름 없는 사랑이 한 영혼의 영원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늘은 사람들이 박수치는 일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작은 자 하나를 품는 일을 더 크게 기억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의 마음이 제자들처럼 변론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늘 비교하고, 늘 상처받고, 늘 서열을 매기고, 늘 인정받지 못한 분노를 쌓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합시다. “주님, 제가 큰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주님보다 제 이름을 더 사랑했습니다.
주의 나라보다 내 자리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작은 자를 품기보다 이용 가치부터 따졌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바로 이 회개가 은혜의 문을 엽니다. 복음은 교만한 자를 무너뜨리고, 통회하는 자를 일으킵니다. 눈물로 자기를 내려놓는 자에게 성령은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새 마음은 예수의 마음입니다. 곧 낮아진 마음입니다. 세상의 높아짐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 젖어 있는 마음입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말 없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기십시오. 교회에서 서툰 사람을 더 따뜻하게 맞아 주십시오. 연약한 자를 성가신 짐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신 거룩한 방문자로 여기십시오.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도 웃어 주십시오. 아이의 말을 귀찮아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병든 사람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십시오. 늙은 부모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끊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신앙이 어린 이의 서투른 질문을 무시하지 말고 품어 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손길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참된 위대함은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바뀝니다. 더이상 큰 자가 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은 자를 살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더이상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더이상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들고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추는 창문이 되기를 원합니다.
☞ 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곁에 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작은 자 곁에 서십시오. 하나님을 영접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름 없는 한 영혼을 품으십시오. 큰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복음 앞에서 작아지십시오.
그때 비로소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바뀌고, 교회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예배가 바뀌고, 기도가 바뀌고, 눈빛이 바뀝니다. 사람을 볼 때 계산보다 긍휼이 앞설 것이고, 내 자리를 찾기보다 주님의 마음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가 여러분의 심령에 내릴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조용히 한 어린아이를 자기 곁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를 보아라. 네가 밀어내던 자리가 내가 머무는 자리다. 네가 지나치던 사람이 내가 품는 사람이다. 네가 작다고 여기던 그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심령이 무너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울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경쟁심이 십자가 아래서 녹아내리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눈이 다시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자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자를 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며, 그것이 성령께서 오늘 우리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의 이름을 작게 부를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의 사랑을 크게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수고를 잊을지라도, 주님은 작은 자에게 건넨 한 잔의 물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가장 작은 자를 품으시는 가장 크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가운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임하셔서, 낮아짐 속에 감추어진 참된 영광과 사랑 속에 숨겨진 하늘의 위대함을 풍성히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