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야화 황진이 <제29.30話>
마음이 답답하고 세상의 갈피가 보이지 않을 때면 진이는
박연폭포를 찾았다.
폭포수 앞에서 노래가 아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가슴이 조금은 열려지기 때문이다.
한양 살이 3년 동안에
생기가 넘치는 세상을 보고
송도에 들어서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진이는 여자들 중에서 뜻이 높고 협기가 있는 자’ 로 평했으며 허균(許筠·1569~1618)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성품이 활달하여 남자와 같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고 높이 평가 하였다.
그렇다. 진이는 예쁜 여자로 태어났으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질풍노도처럼 달리고 싶어 하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개를 닮은 여장부다.
그런데 그녀는 고려의 수도가 아닌 조선시대의 송도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대부집 딸로 출생한 것으로 15년 동안 금지옥엽 호의호식하며 성장하여 신동소리를 들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서녀 신분으로 바뀌어 기생(妓生)의 길로 들어섰다.
숱한 사내들의 품을 통하여 세상살이를 살펴봤으나
진이는 성에 차지 않았다.
사내들은 진이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들을 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자 특유의 정복 심리다.
사내는 여자에게 들어오면 죽는다. 정복이 아닌 포로가 되는 신세다.
진이는 숱한 사내들을 품어 봤으나 마음에 들고 존경할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 진이는 문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번개처럼 떠올렸다. 화담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존경의 대상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진이는 어느 때 보다도 곱고
단아하게 차려입었다.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仙女)모습이다. 어깨엔 자신의 키 만한 거문고가 메어져있고 손엔 송도 명주인 태상주와 간단한 안주가 들려졌다.
화담을 공략하러 가는 길이다.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다. 진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대학》(大學)은 젖지 않도록 가슴에 품었다.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호소하러 가는 길이다. 술과 거문고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 주려는 속내다.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천하의 소리꾼과 바람둥이들에게서 세상살이를 체득한 당돌한 계집이다. 진이의 명성은 송도를 넘어 한양은 물론이고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그녀를 찾아 자고 가는 것을 최고의 예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의 사신뿐만이 아니다. 그들을 보내고 영접하는 조선의 관리들도 명월관에 들려 진이를 탐하였다.
화담도 제자들의 얘기를 통하여 진이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진이가 화담을 뵈러 가겠다고 연통을 넣고 갔으나 집에 있지 않았다. 진이가 화담의 제자가 된다면 홍일점(紅一點)이 되는 것이다.
화담의 문하엔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많다. 행촌 민순, 사암 박순, 초당 허엽, 술한 박민헌, 토정 이지함, 지채 홍인우, 수암 박지화, 연방 이구, 동강 남언경, 죽계 마희경, 이재 차식, 남봉 정지연, 이소재 이중호, 척암 김근공, 사재 장가순 등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다.
이 같은 문하에 진이가 군침을 흘린다. 그녀가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어질 사내가 행여 생길까 기대를 하는 속내다. 하지만 화담의 문하생이 되는 길이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당나귀 등에 화담이 즐긴다는 음식과 태상주를 싣고 화담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이 텅 비었다.
아름다운 집이다. 진이는 마음속으로 화담선생님의 거처가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동리(東籬)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악산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오관산 화곡이 그곳이다. 오관산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 나란히 서 있어 멀리서 보면 왕관처럼 보인다. 기암괴석이 둘러선 화곡에는 봄엔 진달래와 산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산기슭을 불꽃처럼 물들이고 가을엔 붉은 단풍이 타올라 절경이다.
화곡을 한참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움푹 패어 이루어진 연못 화담(花潭)이 있다. 서경덕은 화담 곁에 초당을 짓고 세속과는 거리를 둔 채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하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곳에 진이가 오늘 나타났다.
‘붉은 나무 병풍처럼 둘러친 산에 어른거리고/ 푸른 시냇물 거울 같은 웅덩이로 쏟아지네./ 신선세계 가운데 거닐며 시 읊으니/ 갑자기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 느끼네.’
서경덕의 《대흥동》을 떠올렸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말끔히 개고 반짝 해까지 났다. 비온 뒤의 날로 청자 빛의 상쾌한 분위기다. 초당 주위엔 여름 꽃들이 만발하였다. 비까지 내려줘 활짝 핀 꽃들이 생기발랄함으로써 화담은 더욱 아름다운 신선들이 산다는 동리로 보였다.
진이는 피곤함도 잊은 채
화담 주위와 초당 곁을 살폈다. 연못엔 이름 모를 고기들이 춤을 추며 노래라도 하는 듯이 즐거워 보였다. 연못 주위엔 나팔꽃과 해란초, 그리고 금낭화와 패랭이꽃까지 다투어 피어 또 다른 꽃의 세상을 만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꽃 그림자들이 화담을 감쌀 때 두런두런 인기척이 났다. 화담 일행이 연못 앞으로 드러났다. 진이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허엽이 다가와 당나귀에 실린 짐을 받아 광에 들여놓고 진이를 화담에게 소개해 주었다.
진이의 얼굴이 활짝 핀 나팔꽃
빛깔로 변하였다.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어요./ 이 산중에 계시긴 하지만/ 구름이 자욱하여 계신 곳을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779~843)의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다》를 회상한 듯하다.
하지만 진이는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다. 진이는 화담을 만난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숱한 남자와 뜨거운 살을 섞으며 사랑을 찾아 봤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
진이 그녀가 찾아 헤매는
사랑하는 사내는
22살이나 위인 화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어렵사리 황홀한 기분으로 꿈속에서도 마음대로 못 뵈었던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다.
🔘 풍류야화 황진이 <제30話>
뜬눈으로 밤을 샜다.
화담을 극적으로 만난 황홀감이 진이는 현실같이 않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심장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진이지만 화담 앞에서는 수줍은
일개 여인이고 싶어서일 게다.
화담의 아침은 일찍 찾아왔다.
어제의 비로 삼라만상은 세수와 목욕을 한 듯 깨끗하여 아침 해에 흐릿하게 보이는 샛별(金星)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진이는 뻑뻑한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집을 떠나 화담으로 올 때 맞은 비로 흠뻑 젖었던 옷이 말끔히 말랐다.
화담에 도착하여 화담스승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가 계속
조금씩 쏟아졌다.
그 비로 사위가 젖어있어
그녀의 옷도 마르지 않았던 것을
말리 사이도 없이 너무 피곤하여
그냥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동창이 밝아오는 즈음
진이가 깨어났다.
그런데 화담이 진이 옆에서 자고 있다. 밤새 진이가 화담 곁에서 잤던 것이다. 하지만 진이의 몸엔 밤새 사내 손길이 왔다 간 흔적은 티끌만치도 찾을 길이 없었다.
너무 피곤하여 집에서 준비하여 온 육포와 만두 등으로 태상주를 마신 것 까지는 생각이 났으나 그 후론 기억이 없다.
화담은 처음엔 마뜩찮은 표정이었으나 태상주가 몇 잔 들어가자 마음을 푸는 표정이었다. 온화한 분위기이나 눈 속에 눈이 있는 눈으로 꿰뚫어 보는 시선에 진이는 생애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무서움이 아닌 강렬한 사나이의
힘이 투사(投射)되는 시선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잤다. 그러나 옷깃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사나이 손끝이 왔다 간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이는 바람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허엽이 벌써 나와 있었다.
“잘 주무셨소?”
“예 소녀는 잘 잤습니다만 선비님들은 어디서 주무셨는지요?” “예 우리들은 저 위에 또 초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다 잠이 오면 자고 자다 깨어나면 다시 공부합니다! 딱히 밤과 낮이 없소이다!”
진이는 허엽에게서 알 수 없는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뜨거운 살을 섞었던 소세양·이사종·이생, 그리도 송도 유수 등 숱한 사내들이 자신의 몸뚱이에 목을 맸던 이들에게서 느꼈던 정이 아닌 또 다른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그런데 문득 허엽에게서 화담의 그림자가 보였다. 허엽은 진이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다. 그런데 그에게서 화담의 그림자를 찾았다.
하지만 진이는 표정을 꼭꼭 숨겼다.
“텅 빈 누각에서 자다 일어나 문득 발을 들어보니/ 비 지나간 산 빛 더욱 짙어졌네./ 볼수록 화공도 그려내지 못할 저 경치/ 높은 봉우리 구름 걷히니 푸른 꼭대기 드러나네.‘
서경덕의 《비개인 뒤 산을 보며》를 떠올린 듯하다.
아침 해가 중천에 뜨자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박지화·이지함·박인헌·장가순·홍인우 등이 초당에서 내려왔다. 좁은 방에 콩나물 시루같이 사내들이 질서정연하게 화담 스승을 중앙으로 둘러앉았다. 시래기국에 감자가 섞인 옥수수밥이다. 화담은 몇 숟가락을 먹는 시늉을 하다 국화차 한 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제자들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밥그릇을 비우고 초당으로 돌아갔다. 허엽과 박지화가 남았다. 셋은 국화차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허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명월은 이곳에 어찌 왔소이까?” 진지한 표정이다. 이곳은 청루가 아니란 의미가 담긴 말투다. “화담 스승의 문인이 되려 합니다.” 당찬 진이의 언사(言辭)다.
허엽과 박지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퇴기인 주제에 무슨 고매한 화담 스승의 문인이 되려는 얼빠진 소리냔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진이가 누구인가! 세상 사내들의 심리를 독심술로 읽듯 꿰뚫어 보는 기능이 있지 않은가!
몸과 마음으로 기계(妓界)에서 터득한 세상살이의 지혜다. “소녀는 선비님들의 수발을 들으러 왔습니다. 소녀 아직 학문이 미천하여 어찌 화담 스승님의 문인(門人)이 되겠습니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면서 어깨 너머로 익히다 학문이 쌓이면 문인으로 받아 주십사 찾아왔습니다.” 논리가 정연한 진이의 말에 허엽과 박지화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화대를 받고 몸을 팔았던 퇴기로만 보았다간 큰코다치겠다는 표정이다. “허엽과 박지화 선비님께선 스승님께 소녀가 이곳에서 선비님들 수발을 들 수 있도록 말씀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허엽과 박지화는 국화차를 마시며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묵시적 동의가 이루어진 눈치다.
‘높이 자란 대나무 맑은 개울가에 있고/ 그 안의 정자는 작고도 그윽하다./ 세월은 아직 여름에 속하지만/ 바람과 이슬은 이미 가을이로다./달빛이 숲 사이로 새어 나오고/ 샘 소리는 섬돌 아래로 흐른다./ 누가 이 밤의 정경을 알겠는가./ 끝없이 뻗어있어 거둘 수 없다.’
소옹(邵雍)의 《높이자란 대나무》 8수 중 둘째수를 회상 한 듯하다.
진이는 화담의 홍일점 문인이 되었다. 화담의 그림자가 되어 수발을 들었다. 술을 즐기는 화담을 위해 태상주는 명월관에서 2~3일에 한 번씩 가져왔으며 안주인 육포도 가져왔으나 산에서 버섯 등 산나물은 진이가 직접 채취하여 만들었다.
화담에게선 향긋한 선향(仙香)이 풍겼다. 그의 옆에 있으면 술에 취한 듯 선향에 취하여 온몸이 노곤해져 정신까지 몽롱해졌다. 진이는 그럴 때마다 비몽사몽의 꿈속에서 화담이 이사종으로 변신하여 숨 막히는 정사를 즐겼다. 이사종만이 아니다. 벽계수와 이생, 그리고 소세양까지 차례로 나타나 자기 여자라고 멱살잡이하며 싸웠다.
그런 모습에 사내들이 자신을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노류장화를 넘어 고깃덩어리로 보이는 신세가 처량하여 신세타령까지 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잠꼬대를 하였다.
진이는 특별 배려로 화담과 같은 방을 쓰고 있다. 화담이 올 들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옆에서 수발을 들라는 제자들의 회의에서 내린 결정사항이다. 진이가 잠꼬대를 할 때면 화담은 “황선비, 황선비...”라고 흔들어 깨웠다. 화담의 따뜻한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진이의 눈앞엔 화담이 아닌 옥황상제의 모습이 보였다.
✍초당 [허엽]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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