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도립공원ㅡ연주봉 웅성 467.6mㅡ남한산성 우익문 서문 ㅡ청량산 수어장대 ㅡ남문터널 ㅡ성남 누비길 ㅡ산성역 단풍 산행 ㅡ
작성자임경운작성시간21.11.06조회수1,000 목록 댓글 0남한산성 [ 南漢山城 ]
연주봉 웅성 467.6m
남한산성 우익문 서문
청량산 수어장대 497.9m
남한 산성 남문 터널
남한산성 성남 누비길
산성역 단풍산행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사적.
남한산성 [ 南漢山城 ]산행코스
마천역 ㅡ남한산성 입구 ㅡ연주봉 웅성
남한산성 서문 ㅡ청량산 수어장대 ㅡ
남한 산성 종로 ㅡ남한산성 남문 터널
ㅡ남한산성 성남 누비길 ㅡ산성역 단풍산행
약 12km 약 5시간 30분 산행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
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 연주봉 웅성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
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4,3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
(李世華墓誌銘)이나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
장대·성곽시설. 시도유형문화재.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하부 구조는 자연석을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맨 바깥 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의 주춧돌을 받쳤다.
당초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를 맡았던
수어청(전, 좌, 우, 중, 후의 5관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1751)에는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남한산성 산행 맛난 점심 식사
청량산(淸凉山)은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곳에 사적 제57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이 위치한다.
청량산은 일견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산속이 광대한 분지로 되어 있고
밖으로는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청량산 482.6m,
남한산 벌봉 522m, 한봉 414m,
검단산538.1m으로 이어지고 있어
산세의 구별이 모호하다.
산성은 정확히 말하면 청량산과
남한산에 걸쳐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금암산(金岩山, 322m)과 더불어
남한산맥의 지맥으로 분류되고 있다.
마을 안쪽으로 임금이 납시어 활울
쏘았던 행궁터와 송암정(松巖亭)·
관어정(觀魚亭)·영춘정(迎春亭)
같은 정자 등이 보존되고 있다.
1971년 3월 남한산성과 함께
총 36.4km2를 도립공원 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곧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
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였고,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남한산성 남문밑 터널 통과
성남 누비길
남한산성길 1구간
남한산성 남문 ㅡ산성역 ㅡ복정역
인조를 살린 천마
1636년(인조 14) 12월~
1637년(인조 15) 1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병자호란 때 인조의 파천에 얽힌 이야기.
전쟁이 일어나서 도성이 위험해지자
인조는 머물고 있던 남한산성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신하들이 도착하여 “청태종의
군대가 이미 서울을 점령하였고,
곧이어 남한산성으로
오려고 합니다.” 라고 알렸다.
인조는 대신들과 피신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공주로 파천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옵니다.
강화로 파천하시는 것이
제일 안전하옵나이다.”
라며 영의정 김류를 비롯한 대신들이
각각 다른 주장을 펴다가 결국 강화로
파천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조는 어마(御馬)를 타고 군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떠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어마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마를 다스리는 군졸이 “이랴, 이랴!”
라고 아무리 외쳐도 어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태가 급박하여 대신들은
“어승마를 바꾸어라!” 혹은
“말 모는 자를 바꾸어라!”
라며 재촉하였지만, 여전히 말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말 모는 군졸이 채찍으로 때렸으나,
어마는 전신이 땀을 쭉 흘리면서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서울에서 또 급보가 날아왔다.
“오랑캐 군사가 서울을 떠나
향하여 오고 있습니다.”
대신들과 장졸들이 모두 불안해하는
동안 인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이 이렇게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말머리를 돌이키자!” 라는 어명을 내렸다.
인조가 어명을 내리고 말고삐를 돌리자
어마는 쏜살같이 달려 다시 남한산성에
왕이 머물던 전각 앞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결국 강화도 파천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한산성 안에 머물게 되었다.
뒤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오랑캐가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할 것을
짐작하고 청군을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매복시켰다고 한다.
어마의 고집 때문에 인조가
오랑캐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했다고
해서 이 어마를 ‘천마(天馬)’라고 불렀다 한다.
남한산성도립공원ㅡ
유네스코 등제ㅡ
남한산성 행궁 ㅡ
남한산성 안에 있는ㅡ
조선시대의 행궁ㅡ
조선 시대 행궁은 총 19개 이다 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W39E/490?svc=cafeapp
| 남한산성 영화 ㅡ 병자호란 치옥의 삼전도 https://youtu.be/Qt67Vgl3lsY |
검단산정상 657mㅡ
하남 검단산역 ㅡ
검단산 전투 ㅡ
병자호란때 벌어진 전투ㅡ
경기도 하남시에 있으며ㅡ
한강 팔당댐을 바라보며 솟아있는 산이다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ROU/148?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