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
연재를 시작하면서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조국이 불러낸 피 끓는 사나이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고 세종대왕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을 이야기할 때 태종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600여전 전. 고려가 패망하고 신생국 조선이 태어나던 혼란기에 등장하여 걸출한 족적을 남긴 태종 이방원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성리학의 신선함에 매료되어 학문을 닦던 학동.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문과에 과거급제 한 소년. 전리정랑이라는 말단 관직에 입사하여 청운의 꿈을 펼치던 선비.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열린 눈을 가지고 있던 청년. 그를 그의 조국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치가 그를 부른 것이다. 권력투쟁이 피 끓는 스물한 살 사나이를 끌어들인 것이다.
흔히들 태종은 잔혹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의 화신이라 한다.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피바람을 일으키며 쟁취한 그 권력을 누구를 위하여 어디에 썼느냐가 중요하다.
당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이방원은 세계관에서 일치한다. 북방영토회복이다. 고토회복은 만백성의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갈린다. 정도전은 선정벌 후입국이고 이방원은 선입국 후 영토확장이었다. 물과 기름이다. 의중을 파악한 두 사람은 피 튀기는 투쟁에 돌입한다. 힘이 있어야 꿈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피 튀기는 투쟁을 벌였던 이방원
원나라가 패퇴하고 명나라가 대륙의 맹주로 부상하던 그 때. 요동은 무주공산이었다. 원나라를 무섭게 몰아붙이던 명나라에게 변방 요동은 안중에 없었다. 정도전의 선정벌이 성공할 수 있는 힘의 공백기였다. 몇 년 전 난공불락 요동성을 공략하여 정벌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점령할 여력이 없어 철군했다.
그 당시 대륙에는 무서운 기세로 용트림하던 신흥강국 명나라가 있었다. 태풍도 생성기와 소멸기가 있듯이 한 나라도 융성기와 쇠퇴기가 있다.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붙여 패망시키고 대륙의 맹주가 된 영락제는 이슬람계 환관출신 정화에게 5만 병력과 최신예 함대를 지휘케 하여 서남아시아를 정벌하는 등 이방인 정복에 나섰다.
우리가 요동정벌을 논하던 그때 명나라는 외적으로 원나라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내적으로 형제 조카가 뒤엉켜 내전을 겪고 있었다. 힘의 공백기를 틈타 요동정벌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가정해보는 것은 자유다. 정벌에 성공한다 해도 그 다음이 문제다. 신생국 조선은 요동을 점령 유지할 힘의 여력이 없었다.
그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에는 33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준비된 군사 대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륙을 통일하고 욱일승천 하던 명나라와 맞붙어 대 조선은커녕 명나라 령 조선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 또한 역사의 가정이다.
역사의 가정은 자유다, 모든 백성은 배심원이다
‘피를 묻히며 쟁취한 권력으로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북방영토 확장에 나서자’ 이방원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시점은 그가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방원은 대륙의 정복자 영락제(당시 연왕)를 면담한 일이 있다. 사람을 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그는 그때 이미 영락제의 정복자로서의 정복욕을 읽었다.
세자 양녕을 폐하면서까지 세종을 등극시키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정사를 돌보던 태종 이방원은 권력의 탐욕이 남아서 일까?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된 조선왕국이 518년 26대왕까지 이어져 올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기 위하여 골육상쟁을 벌이고 외척을 척살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그를 심판할 때, 모든 백성은 배심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청년시절 가슴에 품었던 고토회복은 그의 유지를 받든 세종 때 일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통칭되던 함경도와 평안도를 북방 민족으로부터 평정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선으로 구획 지어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한반도를 뒤흔든 대륙의 지각변동, 과거에서 오늘을 읽다
14세기 말 대륙이 흔들렸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던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가 패망하고 신흥강국 명나라가 대륙의 맹주로 떠올랐다. 지리적 특성상 피해 갈수 없는 지각파가 한반도를 흔들었다. 지도자와 지식인 사이에 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친원 세력과 떠오르는 세력을 맞이하려는 친명세력으로 분열되었다. 600여 년이 흐른 현대도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러한 혼란기에 이방원이 가는 길은 파란만장 바로 그것이었다. 배신과 음모, 권력투쟁이 너울대던 그 시절 그의 족적은 나라의 괘적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다. 해양세력이 쇠퇴하고 대륙세가 부상하는 이때, 선이 굵은 사나이 이방원이 활약했던 역사의 현장 속으로 독자여러분과 함께 들어가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