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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산행 여행

유네스코 경주 국립공원 여행ㅡ 경주 불국사 ㅡ대한불교조계종ㅡ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2009년 12월

작성자임경운|작성시간21.04.11|조회수1,408 목록 댓글 0

유네스코 경주 국립공원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서쪽 중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2009년 12월 21일에

사적 제50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

 

(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

 

(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

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

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觀音殿)과 자하문(紫霞門)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절을 중수하였다.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

 

(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

(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

극락전·비로전·관음전·

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

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

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고,

 

굵고 굳센 돌기둥과 돌띠로 둘러 견고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인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

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을 정화하여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1686년(숙종 12)과 1715년

(숙종 41)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없어졌던

돌난간도 복원하였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이 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비슷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

(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였으며,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경덕왕 10)에 건립하였고,

1593년(선조 26)에 불탄 뒤 1612년

 

(광해군 4)과 1688년(숙종 14)에 중건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 단청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 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사상 및 예술의 정수이다.

『법화경』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 탑은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가진 탑으로서,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이기도 하다.

석가탑 내에서 발견된 유물인 국보

제126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표현하는 일곽의 중심을 이룬다.

 

현존하는 건물은 1765년

(영조 41)에 중창된 것이나,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도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숙종 34)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토암산 ㅡ
송 창식 노래ㅡ

https://youtu.be/XIByVbOGnpw

사랑하는우리부처님ㅡ
능이스님ㅡ

부처님 부처님ㅡ
우리부처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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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불국사의밤ㅡ
현인 노래ㅡ


https://youtu.be/WHMydxG9h6w


즐감하세요

경주여행ㅡ
동궁과 월지 ㅡ

안압지 야간 여행ㅡ
영상 입니다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4sb/487?svc=cafeapp

 

즐감 하세요

지도에도 없는 길ㅡ
한가빈 노래ㅡ



https://youtu.be/ElZDE-zgQ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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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국립공원ㅡ
불국사ㅡ

석굴암 토암산746mㅡ
유네스코ㅡ 세계유산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W21M/2?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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