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도립 공원 ㅡ유네스코 등제ㅡ 남한산성 행궁 ㅡ남한산성 안에 있는ㅡ 조선시대의 행궁ㅡ조선 시대 행궁은 총 19개 이다 ㅡ

작성자임경운|작성시간21.06.19|조회수1,929 목록 댓글 0

 남한산성 행궁 

 南漢山城 行宮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행궁터.

사적 제480호이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

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었으나,

2002년 부터 2011년까지

복원이 진행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슈(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다.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938번지에 있다.

행궁(行宮)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아가 머무는 임시장소로서의

궁궐을 말한다.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

행궐(行闕)이라고도 했다. 

행궁에는 낙생행궁,

세조가 다니던 온양행궁,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했던 의주행궁, 

인조 때 건립한

광주 행궁(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 부안행궁,

숙종 때 북한산성에 건립한 양주행궁,

 정조 대 건립한

화성행궁과 전주행궁이 있었다.

명례궁이라는

별궁도 전국 각처에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 입장료 

경기 도민은 주민증 제시하면 

무료 입장권 준다 

 왕의 행차 

 

왕은 군사훈련, 온천행,

선왕의 무덤 참배,

칙사 영접 등을 위해 수시로

궐 밖으로 행차하였다.

왕의 행차에 딸리는

호위 병사들과 수행원,

그리고 의장물의 규모는

행차 목적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대가는 왕이 중국의 칙사를 맞이하거나

종묘 사직에 친히 제사드릴 때의 행차로,

가장 성대하였다.

대가 행차 때 왕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착용하고 대략 1만 명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대가에 비해 규모가 약간 적은

법가는,

왕이 선농단,

성균관,

무과 전시 등에 임할 때의 행차였다.

이 때 왕의

복장은 원유관과 강사포였다.

소가는 가장 규모가 작은 행차였다.

주로 능에 참배하거나

평상시의 대궐 밖 행차,

또는 활쏘기를

관람할 때에 이용되었다.

 

이때 왕의 복장은 군사 훈련과

관련된 융복 차림이 많았다.

공식 행차를 마치고 환궁하면,

왕은 행차준비로 고생한 관련자

들에게 상을 내리는 한편,

행차 도중 직접들은

민원들을 해결하였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는 나라의

절대 권력자와 현장의 백성들이

직접 만나는 장이었다.

 행궁제도 

 

행궁(行宮)은 왕이 항상 기거하는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이다. 

행궁제도는 그 역사적

기원이 매우 오래되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제도화되어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다.

강화행궁(江華行宮),

광주행궁(廣州行宮),

양주행궁(陽州行宮),

전주행궁(全州行宮)이 그 예로,

이들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과

왕실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행궁은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던 강화 고려이궁지

(高麗離宮地)에 세워졌는데,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을 당해

임금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대비를 모시고

이곳에 피난하였고 병자호란때에는

세자를 비롯한 왕실일가족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또 강화행궁에는 장녕전(長寧殿)을

두어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모시었고, 

정조5년(1781)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강화부에서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서적들을 비치하였다.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이다.

양주행궁은 숙중37년(1711)

북한산성 성역을 마치고

산성 내에 지었는데, 

실제로 임금이 피난처로 이용한 바는

없으나 북한산문고를 두어 실록의

사본,의궤, 조선 역대 왕들의

옥쇄 등을 보관하였다. 

전주행궁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유사시에

이봉(移奉)하는 처소로서 전주

동쪽 위봉산의 산성 내에 건립되었다.

행궁은 왕이 능행이나 휴양을 위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임금의 행차는 주로 능원 전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왕실의 능원이 위치하는

경기도 일원에는 이천행궁(利川行宮), 

파주행궁 (坡州行宮),

고양행궁 (高陽行宮),

풍덕행궁 (豊德行宮)

등 여러 행궁이 있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를 위해 조성되었고,

남한산성의 광주행궁도 여주 영릉(寧陵) 및

광주 헌릉(憲陵) 능행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임금의 거동은 질병치료와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온정(溫井)이 있는 온양(溫陽),

이천(伊川), 고성(高城)과

초수(椒水)가 난다는 청주(淸州),

목천(木川), 전의(全義)에는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다.

특히 온양행궁은 조선 초

세종이래 온천지로 이름나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는데,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을 이곳에서 휴식과 치료를

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왕의 행차에는 여러 날이 소요되기도

하였으므로 그 길목에 잠시 묵거나

쉬어갈 용도로 행궁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주필소(駐?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행차에 소요되는 비품을 미리 비치해 두어

민폐를 줄이고자 하는 뜻을 담고있기도 하였다. 

온양행궁을 방문하는 여러 임금들은

과천(果川), 수원(水原), 진위(振威),

직산(稷山)의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또한 화성 행차 길에는 과천과 시흥(始興)의

행궁이 숙소로 사용되었고,

사근참(肆覲站), 안양(安陽), 안산(安山)

등지에 쉬어갈 곳이 마련되었다.

행궁(行宮)은 임금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므로 그 규모가 크지 않았고 위치나

용도에 따라 조금씩 성격을 달리 하였으되, 

궁궐 건축의 특징을 담아 건축되었다.

조선시대의 행궁 건물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남한산성의 광주행궁(廣州行宮)은

최근 행궁터의 발굴조사와 문헌 연구,

일제시대 사진 등을 바탕으로

복원이 이루어 지고 있고, 

온양행궁(溫陽行宮)의 경우

영괴첩(靈槐帖)의 온양행궁도를

비롯한 그림과 여러 문헌의 기록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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