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하루, 매화를 생각함 / 조용미

작성자천사수호|작성시간25.09.13|조회수1,132 목록 댓글 0

겨울 하루, 매화를 생각함 / 조용미

이월, 매화에 기운이 오르면

그 봉오리 따다 뜨거운 찻물 부어

한 송이 우주를

찻잔 속에 피어나게 해볼까

화리목 탁자 근처 매화 향을 두르고 잠시

근심을 놓아볼까

九九의 첫날인 십이월의 어느 날부터 나는

목이 길어지고,

옷은 두꺼워지고 발은 더욱 차가워질 테지만

九九消寒圖의 매화에

하루하루 표시를 해나가며

여든 하루 동안

봄이 오는 저 먼 길을

마중 나가는

은밀한 기쁨을 누려보는 것이다

매화가 피는

삼월의 어느 봄날이 올 때까지

여든 하루는 한 생, 여든 하루는 단 한 순간

매화가 피는 한 생이란

매화를 보지 못하고 기다리는 한 생

탐매행에 나선 이른 봄날 어느 하루는

평생을 다 바치는 하루

두근거리나 품을 수 없는 하루

박지도 / 조용미

박지도 들판에 커다란 보랏빛 양귀비가 천둥처럼 나타났다

박지도의 젊은 스님이 건너편 섬의 비구니를 사모하여

반월도 쪽으로 돌을 놓아갔다

반월도의 비구니도 박지도를 향하여 같은 마음으로

갯벌에 징검돌을 놓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바다의 돌무더기는 서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노두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바라보았는데

들물이 들어도 서로 움직이지 않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돌무더기 중 노두만 남았다는 먼 미래의 이야기 들었는지

나문재 칠면초 멀리 펼쳐진 뻘밭

갓꽃 무리 옆 보라색 양귀비 두 송이 노란 수술을

폭발물처럼 품고 있다 향기도 없이

미래는 향기가 없어서 우리는 그토록 옛날을 찾아 헤매는

거다 찾을 수 있을까

보라색 양귀비가 폭발한 네가 죽었던 그 자리

국화잎 베개 / 조용미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필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며칠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산국 마른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

아직 난 국화잎 베개를 베어보질 않아 잘은 모르겠는데,

시에서 전해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품질 좋은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청하다 보면 ‘아주 고운

잠’에 빠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데 시인은

국화잎 베개를 벤 김에 욕심이 좀 발동한 건 아닐까.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산국 마른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는 건 자초한 상념이고,

그것은 ‘한 생각을 끌어안는’ 시적 번민일지도 모르겠다.

/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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