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진보한다 / 윤재철
추억은
스스로 진보한다
지금도 살아 있는 부드러운 충고이다
나는 아웅산에서 폭사한 김재익 경제 수석의
배만한 구두를 기억한다
구멍이 여덟 개인 낡은 리갈 구두
추억은 비판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울음이었을까
격랑처럼 내 몸을 흔든다
삶이 홀로 아리랑이 아닌 만큼
끊임없이 나를 흔들며 진보했다
그래서 추억은 존경스럽다
푸른 빛 섞여 발그레한 국광 사과
그것이 촌스러웠다면
지나간 내 사랑도 그러하리라
사랑했지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 그리워 하는 것은
푸른 빛 섞인 추억이다
향기
저녁 어스름 말라 붙은 개울길
첫사랑 소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그 하얀 찔레꽃 향기는
지금도 비누 냄새 속에 있는 걸
아침 저녁 나를 닦는
비누 냄새 속에 있는 걸
잠 / 윤재철
내 몸 구석구석
튜브란 튜브는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지고
붉은 녹 가득 낀 채로
내 몸 가운데
단 하나 모터는
낡은 양수기처럼 힘에 부쳐
툴툴거리는데
갈수록 잠은 달콤해
하루가 일생인 양
아침이면 그래도 좀 생생했다가
점심 먹으면 꺾어지고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이윽고 잠에 이르면
잠이 죽음처럼 깊다
하룻밤에도 두 번 오가는 적막한 강
밤이면 세상일 까마득히 잊고 죽었다가
새벽이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을
더듬더듬 다시 걸어 나오는
잠은 내 죽음 연습
어떤 기도 / 윤재철
추석날 밤
창 밖으로 올려다 보는 달이
서울이지만 모처럼 밝아서
방안의 불을 끄고
여섯살박이 딸에게
소원을 빌어보라 하였다
그러니 제법 고개까지 숙이고
열심히 기도하는 눈치길래
다시 불을 ㅋ텨고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쑥스러운 듯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재차 삼차 다그쳐 물었더니
두 가지를 빌었단다
하나는
하느님이 호강하시라는 것이고
하나는
공책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는 것이란다
차라리 묻지 말았을 것을
차라리 듣지 말았을 것을
늘 달라달라 안달하고도 원망스러운
하느님이 호강하시라니
돈 주고 사면 그만인
공책을 만들어주셔서 고맙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