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 윤재철
앞으로 갈 수 없는 길은
기어오르는 것인가
벽이면 담이면 달라붙어
드디어는 넘어서는 것인가
교육원 붉은 벽돌담에 달라붙어
뻗쳐올라간 너를 보면
우리들의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달라붙는 것임을
달라붙어 소리없이 넘어서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벽은 더 큰 사랑이 되고
더 큰 절망이 되고
절망은 뿌리박고 살며
뿌리박고 넘어서는 일임을 알았다
부정이 긍정이 되고
다시 긍정이 부정이 되는
소리없는 싸움과 삶의 논릴ㄹ
너는 뿌리 같은 네 몸으로 엮어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로부터
보이지 않는 작은 뿌리를 심으며
오는 너는 소문없이 기어오르고 있다.
정전 / 윤재철
교무실이 갑자기 정전이 되고
컴퓨터가 모두 꺼지니
금방 전기가 다시 들어오려나
얼마쯤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서로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손발 움직이며 맨손체조도 하고
그러고는 미안한 듯이
컴퓨터 때문에 대화가 많이 없어졌다는 말을 합니다
칸막이 된 책상에 앉아
불 나간 컴퓨터 회색 화면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문득 가슴이 밀물지듯 먹먹해져 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이십오 년 만에 만난 제자는
만나자마자 제게 맞은 따귀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선생님이 오히려 울먹거렸다던 그 따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그 따귀 때문에
자신 살아났다던 얘기를 했습니다
깡패 양아치로 결국은 퇴학을 맞았던 그 녀석이
철학박사가 되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따귀도 그립고
주전자로 넘치게 따라 붓던 막걸리도 그립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며 울던 일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정전은 길어지고
침묵 또한 길어지면서
이상하게 창밖은 더욱 밝아집니다
화단 키 작은 벚나무 붉은 낙엽 떨어지는 것이
슬로우 비디오로 길게 눈에 걸립니다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서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