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굽는 나무 - 곽진구
깊은 계곡에서 내는 허무의 소리를 못 듣겠다
잎 다 지고 열매 다 퍼주고
할 일 마친 나무들이 내는 소리, 그 몸 속엔
기쁨보다 더한 쓸쓸함이 들어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로
어느 날은 풍요를 짓더니
오늘은 가난한 햇살들을 모아 허무를 굽고 있다
빈 나무 아래 누우면
발 밑 그림자를 황금목걸이 마냥 꿰차고 스치는
햇빛 몇 점과 이승에서 맨 처음 터트린
꽃과 그 열매들의 환희 섞인 눈물이 뚝뚝 지면서
아릿한 추억으로 번져 가는 이 고요를 나는 어쩌지 못한다
슬픔도 닳아 슬픔인 줄 모르고
기쁨도 낡고 삭아 기쁨인 줄 모르는
그저 무한량의 적막전(寂寞殿)에 들어
허무나 맛나게 씹어볼 뿐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축복을 받는 몸이다
산아래 별빛 달빛까지 비껴 가는 아주 깜깜한 밤중에
낙엽 덮인 산 속을 걷고 있음으로 해서
낙엽 밟힌 소리가
내 인생의 여분의 길처럼
사각사각 희망의 소리를 구워 앞서 들려주는 걸
당장은 내 기도에 대한 기꺼운 화답인 것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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