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고정희

작성자강건너그집|작성시간26.06.05|조회수301 목록 댓글 0

가을 편지 / 고정희 (1948~1991)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류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뜨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 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 고정희 시집 <이 시대의 아벨> 1983​

가을편지​ / 고정희 (1948~1991)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고정희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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