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 류시화

작성자강건너그집|작성시간26.06.05|조회수322 목록 댓글 0

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 류시화

1

결린 옆구리께 돌무더기만 남은 폐사지에

한 칸 암자를 짓고

겨울을 나고 싶다

뒤꼍 대나무들 싸락눈 맞으며 산경 외는 소리 듣고 싶다

고염나무 마른 열매로 서 있는 묵은밭에

일박하고 떠난 새들

발자국의 내력 세어 보고 싶다

절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반가사유하고 있는 햇무덤

그 번뇌를 들여다보고 싶다

병 깊어 물길 쪽으로 돌아눕는 밤

며칠째 눈 오고

마음이 오랜 변방에서 젖었다

누가 어디 먼 데서 걸어온다

아무 슬픈 일 없는데 이 무명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아무 울 일 없는데 이 무음의 울음은 어디서 오는가

눈송이처럼 세상 속으로 내리더라도

세상과 무연한 곳에 내리고 싶다

결린 옆구리께 꽃들이 기침하는 폐사지로

2

내 사랑은 언제나 과적이었다

빙판길에 자주 갓길로 미끄러졌다

눈 내린 사하촌에서였을 것이다

처음 너와 몸을 섞은 것이

사바의 눈 덮인 이불 밑에서

너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감각 속에 유폐시켰다

날마다 출가하는 부도탑 위 별들을 따라

멀고 추운 길을 걸어 그곳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적설

피안 못 미쳐 당도한 남루한 여인숙

창가에 알몸으로 세워 둔 촛불 글썽거리고

울음 운 것은 문풍지였나

그때 잠 못 이루고 너는 무슨 생을 헤아렸나

너는 나의 화두

너로 인해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알았다

화엄의 세계가 그곳에 있는 듯했다

이 생에 다시 너와 절 아랫마을 여인숙에 들를 수 있을까

폭설에 이 생에서조차 소식 끊긴 사랑을 내생에 어찌 만나겠는가

전생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모로 눕는 밤

눈송이들도

둘씩 짝지어 내릴 것이다

사하촌 그 여인숙 맞배지붕 위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3

겨울 멀구슬 열매는 직박구리 차지다

잔설에 각이 꺾여 눈이 부시다

물웅덩이에 비친 자작나무 그림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픈가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여기 불생불멸 주문 외며

소멸로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세월 지나 이곳에 처음 와 본다

그 절 아랫마을에

일찍 도착한들 꽃이 한 걸음 먼저 와 있겠는가마는

49재 지내고 노란띠좀잠자리 날아가던 윗녘

축문 읽던 골짜기 물은 목이 잠겼다

한 열흘 지나면

산문 밖으로 만행 나갔던 봄이

소맷자락 흔들며 돌아올 것이다

이 사하촌에서

色을 탐하던 꽃

덧없는 몸에 火印을 찍던 꽃

아직 불어 끄지 못하고

눈 녹자 만다라 같은 지붕들 드러난다

이 세상 마을이 다 사하촌 아니던가

여기서 며칠 누군가 기다렸다가

꽃의 뿌리 근처에 누우리

아주 아픈 기억은 옆구리께 사리탑에 묻으리

기척 들려 뒤돌아보면

어느새 큰 눈 내려 길 지워지고

눈 덮힌 사하촌, 절보다 먼저 적멸에 이른다

- 류시화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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