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 손택수
백일홍 꽃망울에
눈을 주길 잘했다
담벼락 아래 스티로폼 상자 속
상추에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 일
어느 집 지붕에 앉은 고양이가 허리를 쭉 펴며 하품을 하는데
그 하품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걸 상상한 일
길게 휘감기는 호스를 쥐고
가게 앞 인도에 물을 뿌리는
코끼리슈퍼 주인과
날씨 인사를 나눈 일
잘했다 사소한 그 일들 모두
일 나간 어미 대신 창가에서
빨래를 개던 내 아비의 일이었으니
아침에 널었던 빨래가 포슬포슬하게 마르는 동안
빨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흙을 뭉쳤다 푸는 동안
-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2014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