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나무가 봄에 보낸 말들이 가을에 도착했다
열매를 쪼개면 봄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의 무지는 바람과 햇볕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풋 순이 열매의 몸으로 둥글어지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동시대의 비극에 등한했나 보다
전쟁 누스를 보며 밥을 먹고
세 개의 태풍을 맞으면서 희랍 비극을 읽었으니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모처럼 지구가 한 가족이 되는 날도
무덤들에게 그곳은 편안하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물소리를 따라나서던 한 해의 발이 멈추는 곳에
데리고 오던 생을 물끄러미 세워 둔다
나무에게도 나에게도 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이니까,
몸이 야윈 바람이 텅스텐 소리를 내면
더는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을 종이 위에 눌러 쓴다
열매의 말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
손가락에 침 묻혀 넘겨도 다 읽을 수가 없다
- 이기철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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