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이 피었다 / 김신용
접시꽃 뿌리가 약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은 섬에서였다.
서울 사는 딸네에게 보내주어야 된다며 옆집 할머니가 호미를
들고 찾아왔을 때, 마당가에 핀 키 큰 접시꽃의 뿌리를 캐어주며
이 말을 들었었다. 산모의 혈기를 돕는 데는 이 뿌리가
정말 용하당께. 그것도 흰 접시꽃 뿌리라야 되야!
섬의 빈집에 처음 몸을 풀었을 때, 마당에 핀 이 접시꽃을 보며
땅에 떨어지면 산산이 깨어지는 접시, 사기로 만든 접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둥글고 흰 접시에 한낮의 햇볕과 고요를 담아오는
접시꽃을 보며, 사기로 만든…… 그래 詐欺로 만든 접시일
뿐이라고…… 곡예사들이 긴 막대기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환상 방황 같은…… 순환회로 같은……
오늘, 도장골의 마당에도 접시꽃이 피었다. 여전히 마술과 같은
묘기의 회전으로 나를 현기증 속으로 침몰시키는 접시꽃,
생의 외줄기 길 같은……, 그 막대기 끝에서 지구의 자전처럼
회전하는 접시, 둥글고 흰 사기 접시.
오늘은 정말 접시꽃으로 피었으면 좋겠다. 경운기를 몰고 가다
논둑길을 굴러 머리를 다친 석이 엄마, 함몰된 頭部에 만들어 붙인
작고 둥그런 접시만 한 뼈, 활짝 접시꽃으로 피었으면 좋겠다.
그 병상에, 흰 접시꽃 뿌리를 한 웅큼 캐어주며, 오늘 접시꽃 뿌리를
몸속에 심었으니 이제 석이 엄마 머리에 하얀 접시꽃이 피겠네!
라며 농담을 건넸을 때처럼
일생을 밭이랑을 흐르며 살아 온 그녀, 기억상실을 앓으며
한낮을 마당에 접시꽃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생의 접시에,
이제 정말 산뻐꾸기 울음소리가 담겼으면 좋겠다. 다람쥐가
찾아와 한나절을 놀다 갔으면 좋겠다.
- 김신용 시집 <도장골 시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