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여자들 / 나희덕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08|조회수397 목록 댓글 0

내 속의 여자들 / 나희덕

내 속에는

반만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와

잎끝이 뾰족뾰족한 오엽송,

잎을 잔뜩 오그린 모란 두어 그루,

꽃을 일찍 피워 버려

이제 하릴없이 무성해진 라일락,

이런 여자들 몇 산다

한 뙈기 땅에 마음을 붙이고부터는

그녀들이 뿌리 내려

내 영혼의 발목도 잡아 주기를,

어디로도 못가고

바람 소리도 못 들은 체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바람의 길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곳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전지가위를 들고

무성해진 가지를 마구 쳐내기도 했다

쳐내면서 내 잎끝에 내가 찔리고

그런 날 밤에는

내 속의 뿌리들, 그녀들, 몸살을 앓고는 했다

다른 뜰에서 수십 송이 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던 봄날

네 반쪽 옆구리에는 목련 한송이 간신히 피어났다

오그린 모란잎 사이에 고여 있는

몇 방울 빗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라일락의 이미 흩어진 향기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은 짐짓 모른 체하며 내 곁을 지나갔다

-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199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