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다로의 연인들 / 강인한

작성자잇꽃|작성시간26.06.09|조회수1,119 목록 댓글 0

발다로의 연인들 / 강인한


독화살아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더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으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말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서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 년, 다시 또 몇 천 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라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 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 격월간 『유심』2009년 3~4월호

▶ 강인한(1944~ )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이상기후』외 다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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