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아, 내 고양이였던 / 황인숙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0|조회수278 목록 댓글 0

란아, 내 고양이였던 / 황인숙

 

나는 네가 어디서 오는지 몰랐지

항상 홀연히

너는 나타났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시간

그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닌 시간

셋집 옥상 위를 서성이면

내 마음속에서인 듯

달 언저리에서인 듯

반 토막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네가 나타났지

 

너는 오직 나를 위해서인 듯 밥을 먹었지

네 밥은 사기그릇에서 방울 소리를 냈지

그리고 너는 물을 조금 핥았지

오직 나를 위해서인 듯

너는 모래 상자를 사용했지

너를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너는 작은 토막 울음소리를 내며

순식간 몸을 감췄지

숨바꼭질을 하며 졸음은 쏟아지고

잠은 오지 않았지

 

그건 동트기 전이었지

우연히 나는 보았지

두 집 지붕 너머 긴 담장 위로

고단한 밤처럼 네가 걷는 것을

그 담장에는 접근 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지

너는 잠깐 멈춰

내 쪽을 흘깃 보았지

잠깐 비칠거리는 듯도 보였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오, 그러나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이여

마저 사뿐히 직선을 긋고

너는 순식간 소실됐지

그 순간 사방에서 매미들이 울어댔지

그 순간 날이 훤해졌지

그 순간 눈물이 솟구쳤지

너는 넘어가버렸지

나를 초대할 수 없는 곳

머나먼 거기서 너는 오는 거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나는 너무도 고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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