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인 / 문성해 ​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1|조회수362 목록 댓글 0

좋은 시인 / 문성해

언제부턴가 시인은 출생 연도를 시집에 적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인은 젊은 시를 쓰게 되었다

태어난 곳도 시집에 넣지 않았다

그때부터 모든 곳에서 태어나기 시작했다

장미 꽃잎 속에서도 붕어의 부레 속에서도

새의 모래주머니 속에서도 태어났다

구름과 태풍 속에서도

지렁이의 내장 속에서도 주소가 생겨겨났다

시인은 등단지를 버리고 아무 곳에나 시를 발표했다

지하철이나 화장실 벽,

개미가 들끓는 땅바닥과 전봇대

사랑을 나누고 난 애인의 등도 가라지 않았다

시인은 출판사에 시를 보내 시집을 구걸하는 대신

아무 곳에나 시를 흘려보냈다

비에 흘려보내고

태풍에 날려 보내고

눈발과 함께 찢어버렸다

아침에 쓴 시들을 목련꽃처럼 구겨버리는 한낮

시인은 그제서야 조금 시인이 된 것 같았다

아직도 버려야 할 게 많고 많았다

- 문성해 시집 <너를 다시 물고기로 만들고 싶어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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