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 김명기
요사채도 없는 절 마당에
일찍 핀 꽃이 진다
한 줌 재가 되어 왕생한
어느 비구의 생을 품고
용맹정진 중인 깨진 부도 위로
한 잎 두 잎, 사바로 흩어지는
보시의 공덕 앞에
홀로 장자와불에 든 당간지주는
깨달음을 얻고도 남았겠다
멀리 두고 떠나온 곳은
한 치 앞도 모른 채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폐허 같고 모두 비워 버린
절터가 살아 있는 세상 같다
마음도 닳고 닳으면 비워질 수 있을까
어둠이 겨우내 묵은 밭둑 아래로
질러 내리는 데 한 치 같은 천년이
또 지나가도 꽃은 지고 있을까
- 김명기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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