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허수아비 / 임보

작성자강건너그집|작성시간26.06.12|조회수247 목록 댓글 0

움직이는 허수아비 / 임보

고속도로 작업 구간 전방에서

붉은 깃발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속도를 통제하는 노란 헬멧의 사내가 있다

500미터 전방 작업 중!

절대 서행!

의 푯말 곁에 종일

한 가지 동작만을 되풀이하고 서 있는

저 황색 플라스틱 로봇!

우리는 차창 너머 그를 내다보며

참 따분한 녀석이라고 웃지만

따분한 것은 그놈만이 아니다

보라,

톨게이트의 좁은 창틀에 끼여

밀려오는 차들의 티켓을 받아

통행료를 계산하는 저 분주한 손들

아니,

은행의 창구며 회사의 데스크에서

온종일 자판기를 두드리는 저 손들

미싱대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여공들의 손

뜨거운 화덕 앞에서 해머를 쥔 근육질의 손

배의 삿대를 잡은 사공의 손도 그렇고

때마다 끼니를 준비하는 주부의 손도 그렇다

저 무료한 반복의 동작들

생각하면

매일 집과 직장을 오르내리는 우리의 일상이

다 그렇고 그렇다

오직 동가숙東街宿 서가식西街食*하며

떠도는 저 노숙자들만이

'따분'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인이다

*東街宿 西街食: 東家宿 西家食의 패러디.

- 임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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