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정일근
비 오자 통도사 극락선원 섬돌 위로
달팽이 한 마리 자신의 집을 지고 찾아온다
집과 같은 업을, 업과 같은 집을 버리고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가고 싶다며
흐르는 물처럼 떠돌고 싶다며
여름 선방으로 달팽이 한 마리 찾아온다
오동잎 아래에서 비 피하던 노승이 비켜서고
일대기를 모두 적시는 빗발 속으로
달팽이가 밀고 온 그 길이 따뜻해진다.
- 정일근 시집 <경주 남산> 2004
이런 밤 / 정일근
깊은 밤 일보러 일어난 젊은 수좌, 잠결에도 섬돌 위에
흩어진 도시 손님들의 신발들을 가지런하게 챙겨놓고
지나가신다
내 작은 인기척, 한 줌 숨소리로도 정갈한 우주율을
흔들어버릴 것 같아 잠들지 못하는 산사의 밤이 있다.
- 정일근 시집 <경주 남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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