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홍합 / 박형권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2|조회수282 목록 댓글 0

여우와 홍합 / 박형권

한 여인이 옷을 말리고 바다에 종아리를 씻었네

갯바위까지 내려온 달맞이꽃처럼

오늘 하루 피워 올린 꽃대가 말쑥하였네

대출금 이자도 밀려 있고 어촌계 회비도 밀려

물일에 푹 빠져 몇 푼이라도 건져야겠는데

반 백년 오줌 누기에 바빠 돌아보지 못한 나의 순정純情이

간지러운 곳을 따라갔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꽃봉오리까지

흠뻑 젖은 잎맥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네

발치의 파래 청각이 오늘따라 칭칭 감겨

온 세상이 향긋한데

- 저 배 주인이세요? 포구까지 좀 태워 주실래요?

- 그럽시다, 뭐 그 정도쯤이야

그 순간,

뱃놀이에 빠져 한세상이 얼얼하였네

내 배 위에 올라탄 그녀,

파도가 옴찔옴찔 나의 뱃머리도 꼬물꼬물

바다의 자식들이 물메기처럼 한 두름, 걸려서 학교도 보내고

나는 행복하여서 그만 죽고 말았네

선창에 배를 대는데 훌쩍 뛰어내리는 그녀

아, 노랗고 귀여운 꼬리가 열두 폭!

뒷골 여우였었네

돌아와 조개밭에서 해종일 딴생각만 하였네

별들도 엉겨 붙어 서로 불 지르는 열대야에 천장에 모기장을 쳐놓고

땀 냄새를 알아주는 여우에게 안겨

여우를 진정 그립게 하고 싶었네

툇마루 끝에서 파도가 찰랑거리면

여우가 삶아주는 새빨간 홍합 오물오물 까먹고 싶었네

해벌쭉 벌어진 홍합 같은 일몰日沒

오늘따라 대강대강 살고 싶었네

**************************************

박형권 시집 <우두커니>

도회적인 것, 세련된 것, 해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지향이 '전위'로 등치되는 21세기 한국 시단에서 박형권 시인의

첫 시집 <우두커니>는 투박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한국시에서 잊혀져 있던 민중적 상상력이 추동하는

그의 시들은, 투박하지만 생명력으로 펄떡인다.

경남 마산 덕동바다의 작은 섬 조개섬에서 4~5년 전부터

조개양식을 하고 있는 박씨의 생활체험은 그의 시의 수원지다.

반농반어로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공간의 특성을 반영하듯

흙과 바다의 상상력이 함께 시집을 가로지른다.

인간과 자연의 공생은 시집의 핵심 모티프다. 시인에게 4월은

'거대한 우주의 말씀이 논물을 따라 흐르'는 (- 물꼬를 트는 사월)

계절이며, 모내기철인 5월은 '아버지가 두 발을 동동 걷고

모판과 사랑을 나눌 때 오월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엎드려

경배하는'계절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그의 감수성은 얼마나 예민하고 풍성한가. 시인은 쓴다.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 (- 우물)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성진 입담은 슬그머니 웃음을 유도한다.

수더분한 노총각과 짧은 옷을 입은 처자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홍합이란 본시 사내들 먹여 사고치게 하는 음식이야 암은, 암은'

이라고 추임새를 넣는 홍합양식장 아낙네들의 입담을 묘사한

시 '행진', 외벌이로 일하는 아내를 둔 도시빈민 남성들을 소재로

'일하는 아내를 다독거려주는 일이 가랑이 안의 살점을 크게

키워서 좌삼삼 우삼삼 혼신의 힘'을 쏟는 일밖에 없다고

풍자하는 '등줄쥐' 같은 시는 활기롭다.

박씨는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그는 "제 시가 저 같은

소시민들도 작게나마 사회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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