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 / 박형권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2|조회수288 목록 댓글 0

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 / 박형권

나이 오십 바라보니 세상에 꽉 찬 것들도 다 헐렁해 보이기 시작하고

또 세상의 보드라운 것들이 나 잡수시오 하고 다가와도 가슴 벌렁거리지 않는데

쌍끌이기선망처럼 밀어주고 당긴

네 살 터울 마누라는

늦여름 모자반처럼 부쩍 감겨온다

덕배는

어제와 다름없이 일 톤짜리 조각배에

마누라를 태우고 달맞이꽃 살포시 오므린 밤에 기름 한 드럼을 채워 넣었다

덕배를 힘껏 짝사랑하던 머큐리 엔진도

우당탕탕 내질러야 할 터인데 이제는 삐걱삐걱 수조기 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에는 노래미 볼락들이 심해를 견디기 지루하여 물가로 밀려와

뻐끔뻐끔 담배 피듯 플랑크톤을 흡입하는데 별빛과 검은 밤에 취하여 해롱거리는데

뜰채로 걷어 올려도

사내 몸 끌어당기는 첫 밤처럼 다소곳하다

일하듯 놀듯 물칸* 가득 활어를 싣고 보니

큰놈 등록금 머잖아 맞추겠다 싶어 마음이 널찍해지고

고요하고 적적한 바다가 뽀얀 인광을 뿌리며 배의 겨드랑이를 핥는다

바다가 까닭 없이 반딧불이 꽁지처럼 환해지는 밤

마누라가 이 지점이다 싶은지

홍어냄새로 발효하여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다

물그림자 황홀하고 별빛 초롱하다

아직 바다는 전복같이 납작하거나 개불같이 길쭉하다

바다의 凹凸이 새 바다를 낳나니 오목 하나 볼록하나 따로 남지 않는

그런 무탈한 세상 올 것만 같은 밤

덕배가 그거 한다

*물칸: 배의 갑판 아래 바닷물을 담아 두는 곳, 활어를 보관한다.

*************************************

마흔여섯 느지막한 나이에 200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현재 반은 마산 앞바다에서 조개를 양식하고

반은 밭에서 농사짓는 농어민의 삶을 살면서 시를 쓰고 있다.

그런 시인이 2009년 첫 시집 <우두커니>를 묶었는데,

그러니까 이 시는 시집을 낸 후에 발표된 비교적 신작시라

할 수 있다. 등단 당시 신경림의 농촌시 계보를 잇는

‘어촌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받은 시는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발원하는데, 첫 작품집에는 소외된

외곽 민중의 서사를 곡진하게 보여주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이 시도 마찬가지로 구체적 생활현장 속에서 보고 들은

배 위에서 ‘그거 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구수한 남성적

입담으로 능청스럽게 그려냈다.

배경 깔고 적당히 간도 맞추면서 민초들의 삶을 재미나게

들려주는 시인의 언어는 가히 민중시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만하다. 시인 스스로가 삶에서 직접 수확한 ‘건수’를

쉽고 친근한 일상 언어로 쓴 작품이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파고 들면서 생명력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건 당연하다.

얼핏 에로틱한 분위기로 활달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도시의 구리고 비릿한 그것과는 차별화된 건강한 성이다.

‘마누라’가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 대목에서

내 살점도 꿈틀한다.

/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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