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 고정희 (1948~1991)

작성자강건너그집|작성시간26.06.13|조회수799 목록 댓글 0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 고정희 (1948~1991)

나직히 그러나 힘차게

소우주의 붕괴가 시작되고

그 붕괴의 갈기를 날리며

우람하게 우람하게 첼로는 울었다

미증유의 혼돈이 결을 내며 쓰러졌다

아 억겹의 자웅도 열시에 열렸다

백 미터 전방으로 물러앉은 산맥들이

다섯 개의 선처럼 떠올라 울고

불 번쩍하는 정신의 섬광

슬픔의 급소마다 찬란하게 꽃혔지

해방이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무서운 피돌기가 시작되면서

점차 붕괴는 붕괴가 아니었어

점차 음악은 음악이 아니었어

드디어 첼로는 첼로가 아니었어

그것은 하느님의 바른손이 되어

우주의 덜미를 흔들고 흔들고 흔들고

그것은 하느님의 왼손이 되어

숯이 된 가슴팍에 햇불을 박았어

오 정신에 의한 정신을 위한 정신의 르네상스,

그때 나는 결연히 마주쳤지

어지러운 정신의 광휘를 보았지

그 이후 나는 믿게 되었어

한 사람의 정신이 첼로가 되는 날

한 사람의 슬픔이 첫눈 같은 詩가 되는 날

우주는 새로이 탄생된다는 것을

나는 간절히 꿈꾸게 되었네

- 고정희 시집 <이 時代의 아벨>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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