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힘으로 / 박형권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6|조회수478 목록 댓글 0

허무의 힘으로 / 박형권

사과해야겠어, 내가 허무를 좀 안다고

'살아서 뭐하겠나'와

'에라, 대충 살자'를 퍼뜨렸거든

우주는 영원하지 않아

지축은 무너질거야, 그렇게 나팔을 불었거든

이 골목 많은 서울 변두리에서는 그게 먹힐 거다 생각했거든

그런데

겨우내 켜지 않은 고장난 보일러와

골목의 재활용을 긁어모으는 리어카와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버린 골목의 지칭개와

허기진 호주머니를 지키고 있는 오백원짜리 즉석복권이

지들도 다 안다고 하는 거야

허무해서

티라노사우루스는 이빨을 남겼고

브리키오사우루스는 족적으로 남겼고

메타세쿼이아는 여전히 서울의 인공 숲에 꼿꼿하게 서 있다는 거야

허무의 힘으로

아들들은 군에 갔다 왔고

딸들은 장학금 많이 주는 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다는 거야

앞뒤 없이 끈질겨도 지들은

깨끗한 생존을 조금 알고 있다는 거야

허무가 이렇게 힘센 놈일 줄이야, 허무 앞에서 허무했어

사과해야겠어

지하방에서 흘러나오는 악다구니에게

옥상에서 펄럭이는 빨간 빤스에게

대문간에 나와 있는 철 지난 봉숭아에게

물들이 않은 손톱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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