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와 열쇠 / 최정례 (1955~2021)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7|조회수630 목록 댓글 0

구두와 열쇠 / 최정례 (1955~2021)

 

레몬나무는 열심히 레몬을 달고 서 있는데

아무도 따가지 않는다

여기는 남의 나라

겨울에도 춥지 않고 얼지 않는 나라

버스는 천천히 달리고 사람들은 느리게 걷고

레몬나무는 한없이 배부르고 따분한 나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빈방 의자 등받이에

혼자 걸쳐져 있는 허드레옷

 

그러나 내 나라 서울과 꼭 닮은 게 있다

싼파블로 가에서 버클리로 꺾어지는 길

어두운 유리 뒤로 열쇠 복제 구두 수선이라고

써 붙인 집

구두는 열쇠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동거하게 된 것일까

서울의 그 사람처럼 없는 듯이

앉아 있는 구두 수선공

대륙의 목화밭을 일구다 놓여난 검은 노예처럼

검은 줄에 묶인 열쇠들은 진열된 구두 굽만 지키고

 

어제는 한 흑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한밤중에도 가끔 내 몸이 흔들린다

꿈속에서도 헤매게 된다

지진이 많은 환태평양 해안 지대

조만간 백 년 만의 큰 지진이 온다고 한다

지진 대비 지침서엔

재난 뒤에 가족이 만날 장소를 정해놓으라 써 있다

 

무너진 건물 헤치고 살아남는다면

어디쯤 서 있게 될까

만리타국 어디서

레몬나무 앞? 구두 수선집?

열쇠와 구두처럼

무의식 속에서도 만나 부둥켜안게 된다면

-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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