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와 열쇠 / 최정례 (1955~2021)
레몬나무는 열심히 레몬을 달고 서 있는데
아무도 따가지 않는다
여기는 남의 나라
겨울에도 춥지 않고 얼지 않는 나라
버스는 천천히 달리고 사람들은 느리게 걷고
레몬나무는 한없이 배부르고 따분한 나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빈방 의자 등받이에
혼자 걸쳐져 있는 허드레옷
그러나 내 나라 서울과 꼭 닮은 게 있다
싼파블로 가에서 버클리로 꺾어지는 길
어두운 유리 뒤로 열쇠 복제 구두 수선이라고
써 붙인 집
구두는 열쇠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동거하게 된 것일까
서울의 그 사람처럼 없는 듯이
앉아 있는 구두 수선공
대륙의 목화밭을 일구다 놓여난 검은 노예처럼
검은 줄에 묶인 열쇠들은 진열된 구두 굽만 지키고
어제는 한 흑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한밤중에도 가끔 내 몸이 흔들린다
꿈속에서도 헤매게 된다
지진이 많은 환태평양 해안 지대
조만간 백 년 만의 큰 지진이 온다고 한다
지진 대비 지침서엔
재난 뒤에 가족이 만날 장소를 정해놓으라 써 있다
무너진 건물 헤치고 살아남는다면
어디쯤 서 있게 될까
만리타국 어디서
레몬나무 앞? 구두 수선집?
열쇠와 구두처럼
무의식 속에서도 만나 부둥켜안게 된다면
-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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